2024-04-19 13:41 (금)
옳은 것은 옳다
옳은 것은 옳다
  • 한민지 기자
  • 승인 2014.05.06 20: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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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민지 사회부 기자
 옳은 것은 옳다. 당연히 그른 것은 그르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해야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책임진다고 설파했다.

 옳은 것을 두고 ‘그르다’거나 반면 그른 것을 보고 ‘옳다’해선 아니 된다는 말이다. 최소한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이를 책임져야 하는 집단이라면 더욱 이 말을 새겨야 할 일이다.

 물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그리 녹록지 만도 않을 터다. 만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반드시 그 이면에 그럴듯한 당위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획일적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더욱 위험한 것은 판단의 기준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일방적 잣대로 왜곡하는 일이다. 이는 죄악이다.

 머리로 생각하되 판단은 가슴으로 해야 한다. 올바른 판단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기자의 시각이다.

 하혈하는 산모의 몸무게가 5㎏ 이상 빠졌는데도 몸이 가벼워 건강해졌다는 진단을 내린다면 이는 ‘무식’이다. 위궤양으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맹장을 적출한다면 ‘무능’의 극치다. 손톱에 박힌 가시를 빼려고 손가락을 절단한다면 ‘무식’도 ‘무능’도 아닌 ‘악의적 고의’다.

 뇌출혈로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매는 환자를 두고 악귀를 쫓는답시고 굿판을 벌이다 사망에 이르렀다면, 그야말로 ‘무식’과 ‘무능’, ‘악의적 고의’가 결합한 종합적 ‘악행’쯤으로 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다.

 우선 올바른 판단을 위해선 이처럼 ‘무식’과 ‘무능’, ‘악의적 고의’ 중 어느 하나라도 기인해선 아니 된다.

 ‘무식’한 판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사람을 해한다. 판단의 옳고 그름을 가늠치 못하기에 누군가를 해치고자 하는 정도의 ‘악의’도 필요치 않다.

 ‘무능’은 더 무섭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진단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자신의 무능을 자각하지도 못한다.

 최악은 ‘무식’과 ‘무능’을 결합한 ‘악의적 고의’다. 이는 설명이 요구되지 않는 ‘악행’이다.

 최근 우리는 ‘무능’한 지도자가 ‘무식’을 다스리는 면면을 봤다.

 진위를 가늠할 판단이 결여된 지도자 탓에 ‘무식’은 마리오네트로 숨을 연명한다. 사안의 진상을 스스로 확인할 능력이 없는 귀 얇은 지도자는 ‘무식’에 휘둘려 ‘무능’한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억지스럽게 늘어놓은 변명은 추하다. 역겹다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여론과 사회도 인정과 반성을 지지한다.

 결국, 진실은 위기에 빛나고, 거짓은 민낯을 드러내며 진흙탕으로 고꾸라진다. 엄연한 범죄를 관행이라 치부하는 것은 사약이나 다를 바 없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담기 어렵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는 속담은 초등학생도 안다. 그만큼 우리는 말의 무게와 파급효과에 대한 진리를 어려서부터 배워왔다.

 진실을 왜곡하는 말.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된 잣대로 논리를 구사하는 말. 아예 고의적으로 진위를 숨기고 당위성을 내세우며 우기는 말. 이런 말들이 사회에 난무하는 것은 비극이다.

 ‘무식’과 ‘무능’, ‘악의적 고의’가 생산하는 ‘말’이 ‘옳은 말’처럼 이 사회에 버젓이 떠도는 것은 더 큰 비극이다.

 ‘표현의 자유’ 뒤에 숨어, 이를 방패 삼아 비극을 양산하는 세력에 대한 심판은 시민의 몫이다.

 시민은 현명하다. ‘옳은 것은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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