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賑貸法(진대법)
賑貸法(진대법)
  • 송종복
  • 승인 2014.05.01 2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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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ㆍ(사)경남향토사연구회 회장
 賑:진 - 규휼하다, 貸:대 - 대여하다, 法:법 - 법

 춘궁기에 곡식을 대여해 주고 추수기에 받아들이는 것으로 일종의 빈민을 구제해 주는 법이다. 이는 역대 위정자가 백성을 위하는 제도로서 일종의 사회보장제도를 칭하여 말한다.

 진대법(일명 조적법)은 고구려 9대 고국천왕 13년(191)때 을파소(乙巴素)가 빈민을 구제한 법이다. 왕이 국정을 맡길 인물을 구할 때 안류(晏留)에 의해 추천되었다. 을파소는 좌물촌(左勿村: 현 평안북도 선천)에 사는 가문도 보잘 것 없고, 물고기 잡으며 농사짓고 있던 중에, 왕이 공손한 말과 예로써 나이 70세인 그를 중외대부(中畏大夫)라는 꽤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나라를 위해 일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직위가 낮다는 이유로 사양했다. 왕이 그 뜻을 알고 최고관직인 국상[國相: 현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이는 한국 역사상 가장 파격적인 인사 조치였다.

 시골뜨기가 최고관직을 차지하자 이에 시기와 불만이 들끓었다. 이때 왕은 ‘귀천을 막론하고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멸족을 시키리라’ 하였다. 그가 국정을 맡아 춘궁기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하여 몰락해 가는 빈민과 사회문제를 막았다. 이같이 백성을 잘 살게 만든 것은 못자리, 물갈이, 거름주기, 추수를 잘 아는 농사꾼을 등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인사는 만사(萬事)요 망사(亡事)다. 시골에 묻혀 살던 민초가 하루아침에 내각수반에 임명됐으니 학연, 지연. 혈연, 계파도 따지지 않고 오직 능력에 따라 등용한 인사였다. 흔히 삼고초려(三顧草廬)라 하여, 유비가 제갈량을 찾아간 사건을 높이 평가하지만 고국천왕과 을파소의 만남은 그보다도 16년 앞선 삼고초려이다.

 <조선실록>을 9년 동안 통독한 방송작가 신모 씨는 근래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라는 책을 내면서, 조선의 임금 27명과 유명인사 600여 명 중에서 인물을 골라 지금 체제의 행정부를 만들려면 어떻게 하는 게 최상의 진용일까 하는 것이다. 즉, 대통령에 세종을, 국무총리에 이원익, 기획재정부장관에 이황, 지식경제부장관에 정약용, 행정안전부장관에 이이, 국방부장관에 이순신, 문화부장관에 박지원, 법무부장관에 최익현, 특임장관에 이항복, 검찰총장에 조광조로 뽑고 있다. 이는 어디까지나 문민위주와 전문위주로 기용된 셈이다. 이와 같은 인사가 바람직하다.

 요즘은 ‘선지원 후보고’ 체제가 아쉽다. 조선 인조 때 권별의 <해동잡록(海東雜錄)>에는 세종 때 ‘김숙자’라는 수령이 있는데, 그는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리자 왕명도 받들지 않고 군량미를 풀어 구휼에 나섰다. 이는 대역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굶주림에 쓰러져도 문책이 두려워 왕명을 기다리던 다른 고을 수령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김숙자는 ‘백성에 마음을 두었는데, 어찌 법에 저촉될 것을 두려워하겠느냐’며 시행했다. 이같이 이번에 개편되는 내각에는 ‘을파소’와 같은 전문분야의 인재와 또한 ‘김숙자’와 같이 백성을 위한다면 ‘선지원 후보고’할 수 있는 인물이 발탁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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