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6 23:20 (화)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23 00: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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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18)
나는 큰집에서 한내 다리 쪽으로 내려오는 데, 앞에서 삼천포고 학생들과 청년 몇 명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걸음을 멈추고 형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여기저기서 돌을 모아 두세 더미를 만들고 있었고, 또 누구를 불러오라며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곧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이 긴박해 보였다.

 조금 후에 벌리 쪽에서 두 대의 트럭이 하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왔다. 두 트럭 위에는 100여 명 정도가 타고 있는 것 같았다. 트럭이 다리에 가까워질수록, 몽둥이와 자전거 체인을 가지고 돌무더기를 지키는 삼천포 학생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트럭이 한내 다리에 가까이 와서는 멈췄고 진주 학생들은 트럭에서 내리자마자 흉기를 들고 다리 앞으로 몰려왔다.

 그러자 삼천포 학생과 청년들은 쌓아놓은 돌을 던지기 시작했고, 진주 학생들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기도 하고, 이마에 맞아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는 학생도 있다. 진주 학생들은 날아오는 돌을 피하느라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했다.

 진주 학생들도 삼천포 학생들이 던지고 땅에 뒹구는 돌을 집어 들고 던지기 시작한다. 투석전이었다. 5~7분 정도 돌이 오가다가, 삼천포 학생들이 돌이 다 떨어졌는지, 던지는 횟수가 줄어들자 진주 학생들이 그때를 기해 물밀 듯이 다리를 건너 돌진한다.

 이에 삼천포 학생들은 제대로 대항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도망을 가버린다.

 진주 학생들은 그대로 밀고 삼천포 시내로 들어온다. 그 당시 진주 학생들은 거칠었다. 특히 진주농고 학생들은 평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4ㆍ19혁명을 거치면서 더욱 사나워져 거침이 없어 보였다.

 진주 학생들은 그대로 삼천포 시내로 전진해 들어왔고, 우리 동네에까지 와서는 전진을 멈추고 모두들 집결한다.

 삼천포와 인근 면들의 중심지 우리 동네, 우리 동네는 동네북이었다. 삼천포의 단체나 개인이 무슨 행사나 하소연할 것이 있으면 꼭 우리 동네에서 표출했었다.

 한 번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 부인이 우리집 앞에 와서 “이놈들아, 우리가 삼천포에서 얼마나 봉사를 했는데, 우리 은혜도 저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도장을 찍어!”하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또 5ㆍ16군사정변이 일어나자, 우리 동네 공원에 큰 판자로 혁명 공약이라든지 포고문을 붙이고, 또 4ㆍ19혁명 후에 정치가 혼탁한 사이,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이재현 의원의 장인댁이 우리집 앞 골목에 있었는데, 그 골목에서 모르는 청년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곤 했다.

 진주 학생들도 이처럼 삼천포로 쳐들어와서 우리 동네에 진을 친 것이다. 그리고 리더인 것 같이 보이는 학생이 농협 앞 계단에서 어디서 가져왔는지 디딤대를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마이크로 삼천포 시민에게 고한다며 큰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를 들은 나는 정말 기가 막혔다. 겨우 ‘시민에게 고한다’ 이런 것 때문에 이런 엄청난 일을 벌인 것이다. 그때는 참 무법의 시기였다. 타지 학생들이 몰려와서 시내 중심지를 장악했는데도, 시청에서도 경찰서에서도 아무도 저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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