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일대 해수욕장에 들어오는 길은 삼천포 시내에서 향촌 들판 쪽이 있고, 외지에서 차를 타고 들어오는 찻길이 있다. 해수욕장 입구 두 쪽은 손님이 많고, 중간의 우리 점포는 두 곳 손님들이 밀려서 들어오고는 했다. 그리고 우리 매점 뒤에는 으슥한 공간이 있어 불미스러운 일이 가끔 일어나기도 했다.
그런데 한 번씩은 삼천포 우리 동네에 사는 동철이(가명) 형이 낯선 학생들을 데리고 우리 매점을 지나 뒤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동철이 형을 따라가는 학생들은 삼천포 학생들이 아니라 진주나 사천쪽 학생 같았다. 동철이 형은 우리 친형과 초등학교 동창이고, 우리 집과 200m 정도 떨어진 선창가 국밥집 아들이었다.
어릴 적부터 고기를 많이 먹고 자라서 그런지, 키가 보통 학생들보다 훨씬 컸다. 동철이 형은 내가 친구 동생이라 그런지 길에서 나를 만나면 늘 웃어 줬는데 어울려 놀아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동철이 형은 한쪽 눈이 약간 찌푸려져 있어서 다른 눈과 크기가 달랐다. 남하고 싸우는 것을 본 적이 없고 또 남에게 싫은 짓을 하지 않는 순한 학생이었지만, 덩치가 크고 기형의 눈 때문에 남들에게 본의 아니게 위압감을 주기도 했다.
나는 그런 형이 우리 매점 뒤쪽으로 낯선 학생을 데리고 갈 적에는 엉뚱한 짓을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동철이 형이 외지 학생들을 데리고 우리 매점 뒤 외진 곳으로 가서 어떠한 짓을 해 왔다는 것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된다.
1960년 3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정부는 12년 독재 정권을 끝나고, 다시 4년의 정권을 잡기 위해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
그래서 전국에서 학생들의 데모가 일어나곤 했는데 마산에서 1960년 4월 11일, 나는 아버지가 보는 신문에서 끔찍한 사진 한 장을 보게 된다. 그 사진은 바다에서 떠오른 학생의 시신 사진이었는데, 눈에는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 바로 ‘김주열’이 최루탄을 맞고 바다에 빠져 죽은 모습이었다. 이 사건의 계기로 전국의 데모는 극에 달해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장면 정부가 임시로 나라를 도맡게 된다.
나라를 무너뜨린 학생들의 파워는 그것으로 소진된 것이 아니었다. 장면 정부는 치안이 불안해 학생들의 군중 행동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진주는 4ㆍ19혁명 때 학생들이 데모에 적극 동참한 지역이고, 삼천포는 삼천포고등학교 한 곳 밖에 없어서 그런지 데모가 없었다. 그러니 두 곳의 학생들 파워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삼천포 시내에는 비상이 걸린다. 진주에서 학생들이 방망이 등 흉기를 챙겨 트럭을 타고 삼천포를 접수하러 진주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것일까. 무엇 때문에 그러는가? 의문의 사건이다.
또 어떻게 이 일이 알려졌는지는 모르지만 삼천포 몇몇 학생들은 분주히 움직이면서, 진주 학생들의 삼천포 시내 진입을 막기 위해 한내 다리 앞에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