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3:22 (목)
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 마산 양덕동의 달님
추억이 묻어있는 명소 그곳을 걸으며…- 마산 양덕동의 달님
  • 김루어
  • 승인 2014.04.17 20:36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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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현장 흔적 기록 없고 市 문패까지…
▲ 옛 마산 양덕동 한일합섬 자리에 들어선 메트로시티 입구(왼쪽)와 옛 기업 영광을 밝히 듯 메트로시티의 불빛이 환하게 빛나고 있다.
한일합섬ㆍ쌍용양회 등 한 세대 먹여 살린 기업 역사 속으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 도시(都市) 또한 영고(榮枯)와 성쇠(盛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생로병사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시는, 진천동지(震天動地)하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고(枯)와 쇠(衰)는 있을지언정 인간처럼 아주 죽어버리지는 않는다. 이는 인간은 누리지 못하되, 도시는 누리는 축복일 것이다. 물론, 간혹 이름이 변하기는 한다. 마산(馬山)이 그러한 경우다. 하지만 마산이 없어져 버리거나 죽어 버린 것은 아니다. 이는 법원에서 개명을 했다 하여 사람이 달라진 것은 아닌 것과 같다. 인간 기록역사 이래 이름 한 번 변하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도시가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면, 사람과 도시는 왜 이름을 바꾸는가? 새로 태어나기 위해서다. 사람은 살아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도시는 늙어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마산의 첫 번째 이름은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포상팔국(浦上八國)가운데 하나인, 마산과 창원을 근거지로 한 부족국가인 골포국(骨浦國)이다. 3세기 말 골포국 등이 주도가 된 포상팔국이 낙동강하구를 두고 신라와 전쟁을 벌이다 멸망한 뒤에 창원을 아우르는 마산지역에 두 번째*로 나타나는 지명은 탁순국(卓淳國)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탁순국 역시 낙동강 하구 주도권을 두고 신라와 백제, 금관가야와 경쟁을 벌이다 6세기 중순 신라에 흡수된다. 이후 마산은 757년 합포현(合浦縣)이라는 세 번째 지명으로 역사에 나타나 원(元)지배하에 있던 고려 후기에, 원나라가 여몽연합군으로 1274년 1281년 양차에 걸쳐 일본을 공격할 때 그 전진기지가 된다. 이 전쟁 실패 뒤 마산은 회원(會原)이라는 네 번째 이름으로 역사에 나타나고, 다섯 번째 이름인 마산은 1425년에 편찬된 경상도 지리지에 나타난다.

 하지만 마산이 주목받는 것은 1760년 조창(漕倉)이 설치된 뒤다. 조창이란 세공미(歲貢米)를 보관하던 창고를 말한다. 조창이 설치된 후 마산은 일거에 남해안 중심항구로 발돋움하여 경남 농산물과 남해안 수산물이 모여드는 상업도시로 성장한다. 당시 마산이 얼마나 번창한 항구였는지는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이라는 속언(俗諺)이 이를 웅변한다. 이러한 마산의 위상은 다소의 부침은 있었지만 개항 때까지는 지속되지만 곧 이은 국권상실로 일제에 강점되는 치욕을 겪는다. 강점기간 동안 마산은 철도가 놓이고 항만이 건설되고 공장이 들어서고 해안 매립으로 시가지가 확대되고 인구가 늘어나는 근대적 도시로 외형이 바뀌지만, 이는 마산의 발전을 위한 개발이 아니라 식민지수탈을 위한 일제의 기반작업이었고 대륙침략을 위한 후방기지화일 뿐이었다.

▲ 양덕동에 떠오른 달빛 아래 3ㆍ15아트센터가 고즈넉이 앉아있다.

 광복과 6ㆍ25 전쟁 뒤 마산은 커진다, 국외에서 돌아온 동포들과 전쟁 피난민들로. 하지만 마산이 대도시로 성장한 것은 산업화과정에서 남동해안 공업지대 중심축으로 떠오를 때다. 그 주역은 한일합섬, 자유수출지역, 한국철강, 쌍용양회 사일로(silo) 등이었다. 다시 마산에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번에는 귀환동포나 피난민과는 성격이 다른, 젊고 생산적인 인구의 유입으로. 그 시절 마산은, 공장굴뚝에는 밤낮없이 연기가 피어올랐고, 부두에는 어선과 화물선이 끊임없이 드나들었고, 시장은 상인들과 손님들로 시끌벅적했고, 도심은 발 디딜 틈 없을 만큼 붐볐고, 밤에도 불빛으로 도시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전국 7대도시. 80년대 어느 시점부터 귀에 설지 않게 들리기 시작한 마산의 위명이다. 하지만 그때가 마산의 절정이었다, 지나고 나서야 분명해졌지만.

 그런데, 무효가 되어 버렸다, 도시는 현재에 지배되기 때문에. 마산의 영광은 무효가 되어 버렸다. 공장 굴뚝은 뽑혀 버렸고 부두를 드나들던 배는 줄어들었고 사일로는 쓰러져버렸고 시장 상인들 음성은 주눅이 들어있고 도심에는 썰물처럼 사람들이 빠져 나가버려 마산이라는 다섯 번째 이름은 창원이라는 흡반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다. 마산이 늙은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이름을 바꿔야 할 만큼.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이 도시를 마산이라고 부른다. 수십 년 만에 다시 온 나그네에게는 새 이름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늙기 이전의 마산만 기억하고 있다. 이 도시가 절정에 있을 때 나는 이 도시에 여러 번 온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어렸었거나 젊었었다.

 나는 강을 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농촌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유년기 때부터, 임지를 따라 도시로 옮겨 다닌 아버지나 도시에서 공부하는 손위형제들에게, 도시와 바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바다와 도시는 늘 내 동경 대상이었다. 고향 가까이 있는 도시 가운데 친척이 있는 곳은 마산이었다. 유년기 어느 겨울방학 때 처음 마산에 왔다. 마산의 첫 느낌은 위압감을 주는 공장들의 위용과,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따뜻한 기후였다. 더 놀라운 것은, 그 겨울에 진달래를 본 것 같은 기억이다. 이 말을 남에게 하면 놀림을 당할 것 같아 지금까지 마음에만 담고 있지만, 내 기억력이 비록 부실하더라도 다른 꽃을 진달래로 착각할 정도는 아니라 믿고 있다. 왜냐하면, 고향 마을 뒷산에는 봄마다 진달래가 지천이어서 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진달래라는 말만 나와도 떠오르는 소꿉동무가 있다. 비록 지금은 그네와 내 삶의 연이은 변전으로 연락처도 모르고 있지만. 우리는 더없이 친한 동무였다. 한마을에 살기도 했거니와 성격도 비슷하고 성적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봄에는 함께 뒷산에 올라 진달래를 꺾거나 그 꽃을 따 먹고는 했다. 그리고는 거울인양 서로를 들여다보며 퍼렇게 된 입술을 가리키며 놀렸다. 그때, 그네가 한 말 한마디는 아직도 내 가슴을 저리게 한다. 이상하게 진달래는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픈 꽃이야. 그네는 집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 시절 많은 동년배들처럼. 그네는 여고에 진학하지 못했다. 나는 그네를 위로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더 곤혹스러웠던 것은 그네가 나를 피한다는 느낌… 그런 가운데 해가 바뀐 연초 어느 날, 그네가 내게 달려왔다, 상기된 표정으로. 마산에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한일합섬이라는 공장이 있어! 그렇게 말하는 그네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우리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편지를 주고받았다. 나는 맨손으로 일어선 카네기에 관해서, 고리끼에 관해서, 정주영에 관해서, 강경애에 관해서 편지에 썼다. 그네는 3교대로 일하면서 공부하려니 고되지만 꿈이 있어 견디지 못할 바는 아니라고 편지에 썼다. 나는 편지를 주고받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방학 때마다 나는, 마산 친척집에 가서, 그네를 만났다. 그네가 일하는 공장에도, 다니는 학교에도, 숙식하는 기숙사에도 가 보았다. 그네와 비슷한 처지의 수천 명의 동년배들이 일하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면서 일하고 있었다. 그네들은 지쳐보였지만 대화를 나눠보면 꿋꿋하고 활달했다. 나는 부끄러웠다, 빌린 게 없으면서도 빚진 느낌… 일요일에는 그네와 마산 명소를 돌아 다녔다. 종매와 같이, 혹은 그네의 반 친구와 함께.

 내가 먼저 대학에 입학했다. 다음해 이월 말 그네가 한일여실고를 졸업했다. 졸업식장은 수천 명의 눈물바다였다. 삼월에 그네는 방송통신대학생이 되었다. 전공은 나처럼 문학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편지로 주고받을 꺼리가 더 많아졌다. 그런데, 가을에 내게 시련이 왔다. 퇴직한 부친이 시작한 사업이 파탄이 난 것. 대학을 더 다닐 수가 없게 된 것은 물론이고, 손위형제들이 있었음에도 내가 가장노릇을 해야 되는 처지가 되었다. 나는 내 처지에서 달아나고 싶었다. 그런데, 달아난 곳이 기껏 그네가 있는 마산이었다. 우리는 전에 간 적이 있는 산호천변 한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그네는 좀 더 나은 조건인 수출자유지역 기업으로 직장을 옮겨 있었다. 말없이 내 말을 다 듣고 난 뒤에도 그네는 술잔만 비울 뿐 여전히 말이 없었다. 상담 대상을 잘못 선택했다는 후회로 나는 잔만 만지작거렸다, 체질상 술을 마시지 못하기에. 하지만 감정적 배신감은 컸다. 그 배신감이 실언을 불렀다. 죽어 버리고 싶어. 술잔을 놓으며 그네가 표정없이 말했다. 대학을 못 다니게 되었다고 죽어? 그렇다면, 죽어버려!

 나는 지금 삼십 수년 전 그네와 갔던 포장마차가 있던 어름을 걷고 있다. 산호천은 복개되고 포장마차 행렬이 있던 자리에는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다. 날은 어두워진지 오래다. 나는 지난 이틀 동안 이 글을 쓰기 위해 마산 곳곳을 다녔다. 월영대, 신마산 도심, 자산성, 무학산, 마산문학관, 어시장, 부림시장, 마산항, 돝섬, 구마산 도심, 조창이 있던 자리, 사일로가 있던 부두, 한일철강자리, 자유수출지역, 그리고 지금 여기 한일합섬이 있던 양덕동… 그런데, 마산을 돌아다니는 지난 이틀 내내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돌아가야 했다. 나는 택시를 잡기 위해 노견으로 내려서다 이유가 분명치 않은 불편함 때문에 다시 몸을 돌렸다. 눈앞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거대한 성채처럼 버티고 서있다, 전에 한일합섬이 있던 자리에. 고개를 들어야 최고층이 보일 정도의 마천루들. 그 위에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달이 떠 있다.

 달은 보름 혹은 보름에 가깝다. 오늘이 보름인가, 어제가 보름인가? 요즘은 날짜 가는 것도 모르겠다. 내가 늙었나 보다. 그런데 삼십 수년 전 그날, 그네가 한말은 왜 아직도 귀에 쟁쟁할까? 그네가 취해 있었다, 정작 취해야 될 나 대신. 밖으로 나왔을 때는 밤이었다, 오늘처럼 보름에 가까운 달이 뜬. 그네는 비틀거리며 산호천변을 걸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기 위해 하루 다섯 시간 이상 잔적이 없어. 동료들도 마차가지야. 야간조일 때는 기본 여덟 시간에 잔업 세 시간 더하여 열한 시간이야. 잠이 모자라는 건 당연하겠지? 그러나 졸면 안 돼, 졸면 산재사고 나기 일쑤거든. 이렇게 살아온 내게, 네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잘 생각해봐. 널 탓하고자 하는 게 아냐. 삶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할 만큼 엄숙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일 끝나면 밤 열한 시 반이야. 그네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그네는 울고 있었다. 행인들이 우리를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그네가 그 눈길에 반발하듯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런 우릴 누가 기억해줄까? 아마, 저 달님만 알겠지, 우리의 눈물과 땀을.

 나는 내 앞에 서는 택시를 두 대나 흘려보냈다. 지난 이틀 동안 나를 불편하게 했던 것의 정체를 비로소 알았기 때문이다. 그 정체는 다름 아닌 흔적이었다. 마산에는 흔적이 기록으로 남지 않았다. 물론, 문화계 경우에는 문학관이나 시비 혹은 기념관까지 있었고, 역사유적지에는 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안내판이나 최소한 표지석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산업계로 눈을 돌리면 달라진다. 마산은 산업발달로 7대도시에 진입했다 쇠락으로 이름까지 바뀐 도시다. 절정기의 마산을 지탱한 기업들은 대부분 몰락하거나 다른 도시로 옮겨갔다. 몰락한 한일합섬이나 쌍용양회 같은 업체는 자유수출지역과 더불어 마산 한세대를 먹여 살린 업체다. 그런데, 그 업체들이 있던 자리에는 표지석 하나 없다. 당연히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의 흔적 또한 기록되지 못했다. 그네들이 기록되어야 할 만큼 비범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혹은 저 밤하늘의 달님에게 맡겨두면 될 일이라는 발상에서 나온 결과라면 참으로 위험한 사고방식이다. 문화와 역사가 중요한 만큼 산업 또한 중요하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도시는 미래를 기약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 과거를 모두 지운다는 뜻은 결코 아닐 터이기에.

 *注) 골포국과 탁순국 사이에, 변진 12국 가운데 하나인 주조마국(走漕馬國)이 마산에 존재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위치 비정을 두고 제설이 분분함으로 제 글에서는 제외합니다.

시인 김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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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세대 2016-08-10 20:12:02
우연히 검색하다 따라왔는데, 제호도 생소한 지방신문에 이렇게 날카로우면서, 가로접고 세로펴는 칼럼이 있을 줄이야! 그런데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필자군요. 한국이 넓은가요, 좁은가요? 이정도 글이 이렇게 묻혀있다는게 신기할정도군요. 제가 섣부른지도 모르겠군요. 좀 더 읽고 다시 언급하는게 좋겠군요. 몇편 않읽었지만 굉장히 놀랍습니다. 좀더 읽고

무열 2014-05-05 19:32:39
양덕동의 달님은
우리들의 눈물입니다. 달의 크기만큼.

서늘한 가슴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서윤 2014-04-19 21:36:04
20년 전에 마산을 다녀왔답니다
그곳 기업에 다니는 남편을 둔 친구가 있기에.

방문해 본 적이 있다는 것만으로 글에 호기심이 생깁니다
특히 명칭의 유래와 산업화의 최전선 현장이었다는.

지나 온, 스쳐 간 산업현장에 기념비 흔적 하나 없는 것다는 생각치 못한 것일 수도 있겠고
산업의 역사를 기록하는 면에서는 아쉽습니다

역사란 보이는 것, 존재하는 것. 소멸한 그 모두가 우리의 역사일텐데요

강대선 2014-04-18 15:29:09
마산 문학관을 들렸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예전 폐병을 치료하던
병원이 마산에 있었다고 하네요 많은 문혹인들도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마산을 찾았고 마산에 정착하신 분들도 계시다고 하네요
전 잘 모르지만 문신 선생님 박물관도 들러 보고
오가는 길에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기도
했었습니다 시인님의 말처럼 마산은
사라지거나 지워지는 것은 아니지요
선생님이 일전에 말씀하셨던 갱신이란 말을
떠올려봅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