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9:19 (목)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16 22: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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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14)
 89. 남일대 스케치2

 1956년 7월 개장한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어머니가 운영하는 ‘남일대’ 점포에서 나는 왕이었다. 먹을거리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어 언제라도 먹을 수 있었고, 쌓여있는 튜브도 언제라도 탈 수 있었다. 덕분에 남일대에 수영하러 오는 아이들에게 나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 번씩 시내 변두리에 사는 학교 친구들이 놀러 와서는 배가 고픈데 돈이 없을 때 외상으로 빵 하나만 달라고 부탁하면, 나는 친구니까 빵을 주고는 했다. 그러나 빵을 외상을 가져간 아이들 중에 나에게 돈을 가져온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도 돈을 받으려고 준 것은 아니기에 그냥 넘어가고는 했다.

 점포에 손님들이 붐빌 때는 정말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국밥과 국수를 만들고, 매점에는 인천이 삼촌과 내가 쉴 새 없이 물건을 팔아 대고, 또 나는 한 번씩 제 시간에 들어오지 않는 튜브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나는 매점에서 물건을 팔 적에는 돈을 금고에 넣기도, 내 호주머니에 넣기도 했다. 금고에 넣으면 점포 돈이 되고 내 호주머니에 넣으면 내 돈이 됐다. 어머니는 그것을 알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으셨다. 점포 금고에 있는 돈이나, 아들 호주머니에 있는 돈은 모두 점포 안의 돈이기 때문이다. 아마 어머니 생각에는 내가 시내에 갈 땐 내 호주머니를 뒤져 돈을 다시 금고에 넣으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우리 매점에서 바다 쪽으로 보고 오른편 바다에는 바위들이 즐비했는데, 그 바위 틈새에는 전복이 살았다. 나는 썰물이 되어 물이 빠지면 바위 밑을 뒤져 전복을 잡아가면 어머니는 그것을 아랫 점포 술집에 파시고는 했다.

 해가 질 무렵 형이 왔을 적에는 나는 형과 같이 점포에서 자게 된다. 그때 이웃 점포에 또래 아이가 있는데, 그 녀석을 불러 형과 셋이 밤늦게 화투 놀이를 하면서 지냈다.

 그 다음 날에 자고 일어나면 우리 점포 뒤에서 훈련을 온 사천 비행장 파일럿 후보생들이 모래밭 중앙에서 줄을 지어 체조도 하고 군가를 부르다가 바다로 뛰어들어 수영 연습을 했었다.

 모래밭 뒤로는 언덕이 되어있는데, 나는 둥근 차바퀴 튜브를 들고 언덕 위로 올라가 튜브를 타고 아래로 미끄럼을 타며 놀았다. 오후에 손님이 뜸할 때는 제일 좋은 침대 튜브를 가지고 바다로 뛰어들어가 수영을 하고 놀았다.

 하루를 마치고 해가 기울 때 형이 오지 않는 날은 어머니는 나를 점포에 혼자 두지 않고 손을 잡고 삼천포 집으로 데려가고 했다.

 해수욕장과 시내까지 중간에 있는 3㎞ 정도의 향촌 들녘은 목화나무, 깨나무, 호박, 참외, 수박 등을 심고 키우는 밭길이었다.

 넓은 들판에 어머니와 나는 지는 해를 바라보며 걸어갔다. 찌는 듯한 삼복더위에 해가 기울 때면 서쪽 하늘은 중천에 있을 때보다 더 커 보이는 해로 온통 붉은색이고, 해 주위의 하늘도, 옅게 깔린 구름도, 바다도 온통 붉은색이었다.

 나는 아름다움에 취해 연신 감탄이 나왔는데, 어머니는 그 붉은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면서 어느 날은 “내일도 비가 안 오고 무덥겠구나”, “장사가 잘 되겠구나”하며 흐뭇해하시기도 하고 또 다른 날은 “내일은 날씨가 짓궂게 구나”하시면서 걱정을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걷는 게 지루할까 봐 옛날 이야기며 세상살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나는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기 위해 어머니와 손을 잡고 길을 걷다 보면 왠지 내 손의 정이 어머니에게로 빨려들어 가는 것 같고 어머니의 정이 나에게로 흘려들어 오는 것 같았다. 걷다 보면 밭의 벌레 소리는 어둠이 짙어질수록 소리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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