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1:39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15 2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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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13)
 88. 남일대 스케치

 사천시 향촌동에 위치한 남일대 해수욕장은 삼천포 중심지에서 동쪽으로 4㎞쯤에 위치한 해변에 있다.

 300m 정도의 깨끗한 해안의 부드러운 모래는 두 손에 쥐고 비벼도 아무런 이상이 없을 것 같은 정겨운 모래다.

 해안 양쪽으로 절묘한 바위가 울타리를 만들고 있고, 700~800m 전방에는 코끼리가 물을 마시고 있는 형상을 한 바위가 있어 신비함을 더해 준다. 사람들은 이 바위를 코끼리바위라 불렀다.

 우리나라 비경 중 한 곳인 한려수도의 중심지에 위치한 이곳은 신라 말기 최치원 선생님이 절경에 감탄하고 남해안에서 제일 빼어나다고 남일대(南一臺)라고 이름을 붙였다.

 한 번은 내가 작은 보트를 타고 이곳에 오다가 해안까지 거의 와서 바닷속을 보니 바닥이 보이고, 또 그 깊이가 가슴까지 올 것 같아 보트에서 뛰어내렸는데 생각보다 깊었는지 발이 닿지 않았다. 갑자기 당한 일이라 수영도 못하고 그냥 허덕거리는데 근방에서 수영하던 동네 형이 나를 발견해 무사할 수 있었다.

 이곳의 바닷물은 이토록 맑아서 국제적으로 청정해역으로 지정된 곳이기도 하다.

 해수욕장이 생기기 전에 삼천포 사람들은 이곳을 ‘모래실’이라 불렀고, 나는 한 번씩 학교에서 소풍을 오기도 하고, 골목대장 팀을 이끌고 와서 온종일 놀기도 했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만 뛰어놀고 하던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런데 1966년 삼천포에서 이곳을 해수욕장으로 만들고 개장하면서, 그 당시 삼천포 상이용사 분회장을 하시던 인주 삼촌이 이곳의 제일 가운데 매점 한 곳을 시청으로부터 배정을 받으신 것이다.

 그래서 간판을 ‘남일대’라 하고 일 년 동안 운영하다가, 제대로 운영이 되지 않자 다음 해에 우리 어머니에게 팔아버린 것이다.

 어머니와 나는 늘 악어와 악어새 사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따라다니면 먹을 것이 생겨 좋았고, 어머니는 내가 곁에 있으면 잔일을 시킬 수 있어 좋았다.

 우리 집 본업은 아버지가 하시는 신사 양복점인데, 어머니는 한 번씩 부업으로 사업을 벌이곤 했고, 그럴 적마다 나는 어머니의 충실한 동업자 역할을 했다. 아버지는 본업이 있으니 해수욕장 점포로 나오기 만무했고, 형은 우등생이라 공부에 매달려 있어, 점포에 전념을 못 했다.

 날씨가 쾌청해 손님이 붐빌 땐 하루 매출이 지금 돈으로 친다면 100만 원 정도될 법한 작지 않은 매점이었다. 가난한 시절 그 정도의 매점이라면, 영업권을 구하기도 힘들고 또 다른 점포의 주인들은 죽기 살기로 장사해 일 년 생활비를 버는게, 여름 해수욕장의 매점 습성이었다.

 점포에서 어머니는 국밥이나 국수를 요리하는 부엌데기 일을 하셨고 매점 총관리는 고등학교에 다니는 막내 삼촌이 맡았다. 중학교 1학년이던 나는 점포의 모든 궂은일이나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나는 매점에서 물건 파는 것도 거들고 또 삼촌이 “부진아 8번 튜브 시간 넘었다. 찾아오너라”하면 온 해수욕장을 뒤져 튜브를 찾아오는 역할을 했다.

 또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매점에서 팔 사과, 참외, 수박, 찐빵 등을 사오는 일을 거들기도 하고, 한 번씩은 내가 직접 사오기도 했다. 나는 그런 일들이 재미있어 싫증이 나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3년 중학생 시절 즐거운 여름 방학은 남일대 해수욕장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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