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2:00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10 06: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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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09)
 서울 서대문구 신촌역 앞 동네, 지금은 좌우로 이화여대와 연세대를 끼고 있고, 전철로 한 정거장만 가면 홍익대가 있어 이곳은 젊은이들이 모여 불야성을 이루는 곳이다.

 그러나 1960년대 이곳은 등교하는 대학생들만 붐빌 뿐 인적이 드문 한산한 곳이었다. 신촌역 광장에서 전철이 다니는 대로변으로 걷다가 왼쪽에서 대로가 맞닿는 코너에는 단층의 허름한 사무실과 살림집이 있었고 그 아래 인쇄소가 있었다.

 이곳이 만화의 본산지 진영 인쇄소이고, 출판사이다. 내가 서울에 와서 작가에 입문하기 위해 제일 먼저 찾아온 곳이기도 하다.

 이 진영 출판사 주위로 진흥 문고, 제일 문고, 광문당, 독수리 문고 등 우리나라 유명 만화 출판사가 집결해 있었고 또 만화가들의 자택이나, 사무실이나 문하생들의 하숙집이 몰려 있기도 했다. 신촌역 앞에서 왼쪽 골목길은 니나노 술집이 즐비해 있었는데, 이곳의 주 고객은 만화가, 출판 종사자 같은 만화 관계자들이었다.

 1960년 중반은 대여점을 상대로 만화 출판 사업이 크게 번창해 있을 때였다. 그래서 이곳의 출판사들 즉 진영 출판사, 진흥 출판사, 제일 문고, 광문당, 부엉이 씨리즈, 독수리 문고(?) 등이 공모해 대여점 만화를 독점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이들 출판사 대표들이 주주가 되고, 만화가 대표로는 박기당 선생님을 주주로 영입한다. 출판사 측에서는 만화가들을 업고 가야 하기 때문에, 출판사와 만화가 사이에 징금다리 역할의 작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생겨난 ‘합동’ 출판사는 전국의 모든 대여점과 독점 계약을 맺는다. 계약 내용은 ‘합동 출판사에서 출판되는 만화책은 100% 구매할 것’, ‘타 출판사의 만화는 구매하지 않는다’ 였다.

 계약하지 못한 대여점들은 계약을 맺고 신간을 받는 대여점에서 보고 난 책을 받아서 영업했다. 그래서 계약을 맺은 대여점을 신간 대여점이라 불렀고, 신간 대여점에서 책을 받아 영업하는 대여점을 구간 대여점이라 불렀다.

 이 독점 판매 루트로 인해 판로가 막혀버린 다른 출판사와 만화가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도산했고, 그 덕에 합동 출판사 측과 거래하는 만화가들은 호황을 누렸지만, 다른 작가들은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자기 원고를 출판할 길이 막혀 고생했다.

 그때 억울한 만화가 몇몇이 박기당 선생님을 찾아가 이 부조리에 대해 따졌다. 작가들은 박기당 선생님이 자신들 편에 서서 대변해 주길 바랐지만, 대화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흘러갔다.

 화가 난 만화가들은 박기당 선생님에게 “당신은 만화가요, 출판사 사장이오”하고 따지자, 박기당 선생님은 “나는 만화인이요”라고 했다. 그 말은 만화라는 큰 덩어리를 놓고 볼 때, 작가들은 한쪽에 치우쳐 생각하지만 만화인은 큰 덩어리를 본다는 뜻이다.

 그 당시 박기당 선생님은 만화인으로서 정당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훗날 그 ‘합동’ 출판사가 부당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지금은 그런 영업이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아무튼 박기당 선생님은 한참 동안 합동 측 대변인으로서 만화가들과 대립되어 왔다. 합동의 무너질 때까지 안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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