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21:26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08 21: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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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08)
 85. 박기당 선생님의 창작 생활

 이제 만화 시장은 만화 대여점밖에 안 남았다. 박기당 선생님은 만화를 그리기 전에 역사화, 극장 간판, 초상화 등을 그리면서 세상 풍파에 익숙한 덕인지 곧 대여점 만화 습성에 맞춰 원고 제작 시스템을 구성한다.

 우선 선생님이 스토리와 데생을 하지만, 노련한 문하생을 훈련시켜 펜터치를 하게 한다. 또 오랫동안 충실한 문하생은 창작 작가로 등용시켜주는 아량도 보이신다.

 그 예로 대표적인 작가가 송칠성 선생님이시다. 원래 송칠성 선생님은 본명이 송길성인데, 일본에 살던 탓에 한글 맞춤법에 익숙지 못했던 박기당 선생님이 송길성의 ‘길’자 위에 점을 하나 찍는 바람에 출판사 편집부에서 이 이상한 글자를 ‘칠’자로 보고 작가 이름을 송칠성 이라 출간했고, 송길성 선생님은 한동안 그 필명을 사용했다.

 박기당 선생님의 작품을 열거해 보면 만화소년소녀에 ‘흑선풍’과 ‘고양이의 복수’라는 괴기 만화가 있다. 고양이 복수는 한 고양이가 사람에게 맞아 죽은 가족의 복수를 하는 작품인데 그림도 괴기스럽고 내용도 섬뜩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이 인기를 얻으면서 박기당 선생님은 전설의 고향 같은 야담 작품을 많이 그린다. 또 SF 만화 ‘우주인 카우스’를 출간하는 등 다양한 작품 세계를 선보인다.

 60년대도 작품의 선이 간결해지면서 ‘울보 대장’, ‘감초 선생’, ‘저승피리‘, ‘아랑과오랑’, ‘마술동자와 요술피리’ 등을 출간하면서 거침없는 작품 활동을 하신다.

 70년대가 되면서 신촌 ‘합동’의 동업 출판사 윤동근 사장이 서점 판매용 제작 회사 ‘화문각’을 설립하고, 박기당 선생님에게 ‘성웅 이순신’ 원고를 제작한다.

 성웅 이순신의 완벽한 데생에 꼼꼼한 펜터치는 우리나라 만화사에 길이 남을 대작이다.

 나중에 다른 출판사에서 재판을 하면서 이 책에 박정희 대통령의 격려글이 실리기도 한다. 1960년대 박기당 선생님이 왕성하게 원고 제작을 할 적에는 20세를 갓 넘는 선생님의 젊은 문하생들도 한 권 펜터치 원고료를 한 달 하숙비로 받았는데, 그 원고를 일주일에 한 권씩 도왔으니, 문하생들의 수입도 짭짤했다.

 그러니 박기당 선생님의 수입은 그보다 훨씬 많은 것이다.

 그때는 만화가들과 니나노 술집이 익숙했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나나노 술집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만약 있다 해도 서너 명이 몰려가 한복을 곱게 입은 아가씨와 코가 비틀어지게 한판 벌리려면 술값이 백만 원은 넘을 것이다.

 그 시절은 아가씨들 몸값이 저렴했는지, 아니면 만화가들의 수입이 좋아서였는지. 그때 만화가들은 화끈하게 벌면서 화끈하게 쓰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대여점 만화 시장이 최고로 호황을 누렸다. 신문 지면에서는 ‘불량 만화다, 저질이다, 아동들의 독이다’하면서 만화를 비하했지만, 그래도 폭발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대여점은 계속 늘어나 전국에 3만여 군데나 되었고, 만화는 하루에 50여 편씩 쏟아져 나온다. 이런 기록은 세계 만화역사상 유일한 기록이다.

 이때쯤 신촌의 ‘합동’ 출판사가 만들어진다. 합동은 대여점의 모든 판로를 휘어잡았고, 다른 출판사는 물론, 합동 출판사와 계약을 하지 않은 작가들은 활동을 못 하게 된다.

 20대 초반의 젊은 나도 마찬가지였고, 어려운 생활고가 더 어려워졌다. 그런데 박기당 선생님은 이상하게도 합동 출판사의 측과 계약해 작가들에게 많은 원성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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