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창의원 둘째 손주인 영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영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천포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삼천포에 내려온 내가 영호를 만난 곳은 수창의원이 아닌 다른 집 마당이었는데, 나를 반가워하면서도 어찌 된 일인지 어릴 적 쾌활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이 아니었다. 왠지 눈빛이 우수에 차 있었고 마음의 문을 닫고 웃는 그런 미소였다.
영호에게 내가 누구인가. 철없을 적 만나 성장하면서 자기 형보다도 더 많이 따라다니던 형이 아닌가. 그런데도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 후에 있을 파란만장한 자기 삶을 예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나에겐 영호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영호에게는 여동생이 하나 있었고, 또 강 권사님이 늦둥이 아들을 하나 낳았는데, 그 늦둥이가 자라 초등학생이 되었을 땐 노는 모습이 거칠고 대담한게 마치 영호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고향에 다시 들렀을 때 매번 그랬던 것처럼 수창의원을 찾았다. 그런데 수창의원 별채 현관문에 커다란 널빤지 두 개가 X자로 못이 박혀 있었고, 집 안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온 식구들이 나에게 정을 주었는데, 이 집 식구들과의 추억들이 주마등 같이 스쳐 지나간다. 이제 그들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서 나는 작은 쪽지를 만들어 현관을 가로 지르고 있는 널빤지 사이에 꽂아 놓았다. “상호야, 영호야 어디 있느냐! 이 쪽지를 보거든 연락하거라”라고….
나는 서울에 가서 한참이나 기다렸지만 결국 답장은 오지 않았고 수창의원은 수년간 그런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수창의원 식구들의 행적은 소문으로만 듣게 된다.
양자에게 청혼했던 아나운서는 한국 최고 재벌의 사위가 되었지만 얼마 살지 못하고 이혼을 했고, 수창의원의 노부부는 그 후 몇 년 더 못 사시고 돌아가셨다 한다.
그리고 수창의원 사위 부부 즉, 아이들의 부모님은 미국에 가서 살다가 돌아가시고, 양자는 미국에서 중앙대 메이퀀하고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해 산다고 한다.
부산으로 간 영호는 결혼을 하고 살았지만 생활고에 택시운전도 하고, 결국에는 이혼한 후 험하게 살다가 생을 마쳤다 한다.
모두 다 가슴 아픈 소문이지만 그래도 상호는 큰 병원에서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잘 지낸다 한다.
삼천포 중심지 로타리 동네는 내가 성장하고 서울로 올라간 후로는 나를 잇는 골목대장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골목대장 팀 아이들이 자란 후에는 다시 그런 아이들을 볼 수도 없었다.
한적하고 아이들이 뛰놀기 좋았던 로타리 동네. 몇 년 후 가운데 공원이 없어지고 길이 만들어지더니, 차츰 차들이 많아지고 번잡해져 이제는 아예 주차장처럼 번잡해져 아이들이 뛰어놀 수 없는 장소가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