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2:45 (목)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4.03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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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104)
 수창의원 식구들은 유난히 남에게 주기를 좋아했다. 수창의원 노 사모님은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 우리 집과 쌍둥이 네 식구들이 추워서 손발이 트지 않도록 손에 바르는 무색의 물약을 해마다 한 병씩 챙겨주셨고, 우리 식구는 그 약을 바르며 긴 겨울을 이겨 나가곤 했다.

 상호는 ‘새벗’ 잡지를 한 번 보고는 나에게 주는가 하면 어느 날은 영호가 자기 어머니가 큰마음 먹고 사준 만년필을 나에게 줬다가 영호 어머니께서 그 사실을 알고 다시 돌려달라고 해 다시 영호에게 돌려준 적도 있다.

 수창의원 아이들의 어머니 강 권사님은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주일 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새벽 기도를 잘 다닌다며 늘 칭찬해 주셨다.

 외모도 단정하신 강 권사님은 내가 교회에서나 집에서 뵐 때 늘 꼿꼿이 앉아 계신게 마치 박정희 대통령 시절 육영수 영부인께서 행사 때 꼿꼿이 앉아 계시던 그런 모습이셨다.

 큰아들 상호는 공부밖에 모르던 전형적인 모범생이었다. 우리 골목대장 팀이 자기 집에서 뛰고 구를 때는 함께 어울렸지만 노산이나 각산 등에 원정을 갈 때는 그 시간에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한 번도 따라나선 적이 없었다. 상호에게는 논다는 것이 나랑 같이 교회 형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 친구 중 운봉이와 상호는 진주에서 중ㆍ고등학교를 다녔다. 크리스마스가 되면 나는 진주에 있는 두 친구와 카드를 주고받고 했다.

 세월이 흘렀다. 내가 서울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해에 노 원장님 부부가 살던 본채는 주유 사업을 하는 분에게 팔렸다. 수창의원 세 동 중에 한 동을 판 것이다.

 그 본채를 사신 분은 우리 식구들과 친하게 지내는 분이어서 나와 우리 형에게 본채 방 한칸을 사용하게 해주셨다. 그래서 나는 형과 삼천포에서 나올 때까지 그 방에서 생활했다.

 드디어 나는 만화가의 꿈을 안고 서울로 올라왔고, 상호는 서울대학교 의대에 입학했다.

 양자는 서울 중앙대학교에 입학해 셋은 서울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이끄는 골목대장 팀의 팀원이었던 영호는 삼천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계속 머물게 된다.

 82. 서울에서의 생활

 나는 서울에서 만화를 그리기 위해 처음에는 만화의 본산지 신촌에서 머물며 진영출판사의 소개로 유세종, 동해, 박부길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나중에 하영조 선생님을 만나 자리를 잡게 됐다.

 그러던 중 하루는 시간을 내어 서울에 있는 상호를 만나기 위해 주소만 들고 서울대 근처 창신동으로 갔다. 창신동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 골목길을 돌고 언덕 위로 올라가 달동네에 위치한 상호의 하숙집을 찾았다.

 상호는 30평 남짓한 작은 집에 방 한 칸을 얻어 고등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모습은 가난한 고학생의 모습이지, 귀공자 상호에게는 어울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잠시 후 상호는 학생을 돌려보내고 나를 맞이했다.

 두 친구는 고향이 아닌 서울에서 처음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나와 헤어지면서 “부진아, 너 우리 어머니에게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사실을 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물론 나는 그런 말을 상호 부모님께 하지 않겠지만 상호가 나에게 그런 부탁을 하는 데는 나름 사정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난 것이 나와 상호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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