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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失戀)
실연(失戀)
  • 김루어
  • 승인 2014.03.27 19:3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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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내게는 시(詩)라기보다는 산문(散文)이다. 오는 것이 느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수 경칩이 지난 삼월이라 하나, 겨울은 그림자가 긴 계절이다. 그 겨울 그림자만큼 김장김치에 질려있었다. 점심 뒤에 쌀쌀하던 날씨가 풀리고 햇살이 돋기에, 밥상분위기를 전환할 찬거리를 마련하려고 재래시장에 나갔다. 아직 노지(露地) 봄나물이 나올 시기는 아닐 텐데도 시장에는 쑥, 달래, 냉이, 씀바퀴, 돌나물, 참나물, 취나물, 돌미나리, 두릎 따위의 봄나물이 나와 있었다. 물론, 하우스재배인 봄나물일 터이다.
 하지만, 봄나물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에 새순이 돋는 느낌이 되었다. 동시에 지난겨울 나는 무엇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저 여린 것들이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새순을 올리는 동안. 생각한 것보다 값이 비쌌지만, 장바구니에 봄을 가득 담았다; 쑥으로는 국을 끓이고, 두릎으로는 전을 부치고, 봄동으로는 쌈을 싸먹고, 돌미나리나 달래나 냉이나 씀바퀴나 돌나물 취나물 같은 것들은 저장해놓았다 다른 식자재로 쓰면 내 속은 봄으로 가득하리라 생각하며. 시장에서 나올 때는 양손에 든 장바구니가 힘에 겨웠다, 집안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봄꽃이 핀 작은 화분도 몇 개 산 탓에.
 버스정류장으로 가는데, 그새 햇살이 쓰러지고 바람이 차가워져 자켓 깃을 세우기 위하여 잠시 걸음을 멈춰야 했다. 그때, 누군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니 스물 초반의 젊은 처녀, 가까운 친구가 늦게 본 고명딸이었다. 반갑고 안쓰러웠다. 그리고 길에서 만났다는 게 신기했다, 같은 도시에 산다 하나 이 아이 집과는 버스로 반 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였기에. 아이는 요가센터에 다녀오는 길이라 했다. 이 아이의 성장을 간헐적이나마 지켜본 어른의 입장에서나, 제 엄마와 나눈 세월의 정리로 보아서도 그냥 헤어질 수가 없었다. 아마, 아이도 같은 마음이어서 나를 불러 세웠을 것이다. 아이를 데리고 가까운 찻집으로 갔다.
 마주앉아 보니 아이는 얼굴도 몸도 반쪽이었다. 병자 같았다. 새삼 마음이 아팠다. 내 기억엔 넘치는 데가 있는 아이였는데, 아이는 주문한 차(茶)가 올 때까지, 묻는 말에만 대답할 뿐 먼저 말을 하는 법이 없었다. 얼마 전 제 엄마와 만나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래도 이젠 좀 나아. 하나밖에 없는 딸 잃는 줄 알았어… 첫사랑이라 상처가 더 컸던 것 같아! 그 말을 들었을 때, 남의 일만 같지 않았다. 나이가 더 많기는 하지만, 내게도 젊은 딸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차를 권하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래 이젠 좀 괜찮니? 네, 요가센터에서 명상법을 배운 뒤부터는 마음의 평정을 얻어가요. 아이가 볼까지 붉혀가며 수줍게 말했다.
 저어기 안심이 되었다. 첫 사랑의 상처는 대개 성장통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지독한 열병(熱病)이고, 또 어떤 이에게는 평생 안고 가야 하는 화인(火印)일 수 있어서이다. 미성년기에 겪는 첫사랑보다 이 아이처럼 성년기 초기에 겪는 첫사랑이 더 위험 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미성년기 첫사랑은 대개는 대상이 비대칭 이성(異性)이어서 현실성이 약해 짝사랑에 지나지 않을 개연성이 많지만, 성년기 초기에 겪는 첫사랑은 대칭, 비대칭 이성을 불문하고 자신이 성년대접을 받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인생 자체가 변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전보다 많이 변한 것 같았다.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활달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아이였던 것이다. 그럴 만도 했다. 집안이 가멸찰¹ 뿐만 아니라 학업성적도 뛰어났고, 게다가 외모까지 출중했으니. 당연히 부모의 기대가 컸고 아이는 그 기대에 부응 서울상위권 대학에 진학했고 거기서도 돋보이는 성적이어서 그 부모의 자랑이 되었다. 그런 아이가 작년가을 돌연 휴학계를 내고 내려왔다. 제 엄마 말에 따르면 한 달째 연락이 안 돼 올라가보니 실연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 있더라는 것…….
 아이는 제 말처럼 이제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대화를 나눌수록 제 상태와 생각을 조분조분 개진했다. 이전처럼 거침없거나 오만한 느낌을 주는 게 아니라 차분하고 사색적인 느낌을 주는 겸손한 태도였다. 아이 이야기를 듣다 문득, 실연(失戀)은 시련(試鍊)이고 시련은 사람을 성장(成長)시키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흐뭇해졌다. 그리고 부러워졌다, 상처입고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청춘의 힘이. 이제 복학해야지? 추졸(秋卒)제도가 없어 복학은 가을학기에 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이를 잊고 우리는 한동안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마 남이 보았으면 정다운 모녀 같았을 것이다.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리는 찻집에서 나왔다. 아이가 내 장바구니 하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들어주었다. 버스가 왔다. 아이가 장바구니를 넘기고 꾸벅 인사를 했다. 다행히 버스에 자리가 있었다. 무릎에 장바구니 두 개를 올리고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아이가 전철역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아간다는 말을 들은 안도감 때문인지, 아이의 발걸음이 겨울을 밀어내고 오는 봄처럼 가벼워 보였다.
 그렇다. 봄은 겨울을 밀어내고서야 온다. 그러면, 봄은 어떻게 겨울을 밀어내는 것일까? 버스가 출발했다. 순간 흔들리는 장바구니를 고정하기 위하여 시선을 돌렸다. 장바구니 속에 든 화분의 봄꽃이 수줍게 웃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식물학자의 말이 떠올랐다. 봄꽃은 따뜻하기만 하다고서 피는 것은 아니다. 겨울을 지내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는 특성이 있다. 추위에 식물이 노출되어야 꽃분화가 일어나기 때문, 이라는 말이.
  注)가멸찰¹ : 동사원형은 가멸다, 가멸차다, 가멸지다, 가멸하다 등 여러개다. 뜻은 재산이 많고 넉넉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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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관 2014-04-04 10:25:44
글을 다 읽고 나니 눈물이 납니다
시련 없이 피는 꽃이 있을까요
겨울의 추위를 이기고 피는 봄의 풀꽃들을 보면 그래서 감동입니다
아이가 복학해서 학업에 집중하길 저도 빌겠습니다....

건강하세요~ㅎ

강대선 2014-04-01 11:24:59
실연.. 시련..
그렇게 봄이 오는 모양입니다..
제비꽃이 꽃을 피우지 않기에 냉장고에 넣었다고 뺐다는
시인의 말처럼..
시련이 있어야 꽃이 피는가 봅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그 시련이 두려워 이것저것 핑계삼아 피하고만 있습니다..
두려움은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하나 봅니다..
성장통...
봄은 이미 곁에 와서 꽃을 피우고 있는데..
저 혼자,, 겨울 속에 있는 것은 아닌지..
새삼..스스로를 반성해 보았습니다

이서윤 2014-03-30 14:51:55
콧날이 시큰해집니다
마음을 읽어주고 다독여준다는 것
시린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이지요

성장통이라 말하고 싶어요
사랑이나 삶이나 살아내는 모든 것은 실연의 아픔을 이겨내야 성숙해지는
성장통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조금전 근무 중에 잠시 나가 목련과 개나리를 따스하게 보고 왔습니다
쌀쌀맞던 봄도 어느새 마음을 열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