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1:08 (금)
여행작가 이동근 힐링 스토리-매축지 고물상 이정철 씨
여행작가 이동근 힐링 스토리-매축지 고물상 이정철 씨
  • 이동근
  • 승인 2014.03.23 21: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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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에 마음 더 가요"
▲ 매축지에서 모든 생을 보내온 이정철 씨.
시간 속 존재했던 모든 것들에 애정 쏟아야

 닫혀 있는 서랍장을 열어보듯, 과거란 먼지가 묵은 오랜 기억들을 꺼내보는 일이었다.

 새로운 것들이 자꾸 쏟아져 나오는 이 소비적인 시대에 내 품 안에 끌어안고 혹시나 떨어뜨리지 않을지 조마조마하는 심정으로 무언가를 애틋하게 만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듯 애정을 쏟아본 적은 언제였던가?

 당신의 감춰진 서랍장 안으로는 어떤 것들이 숨겨져 있을까?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당신을 마주했고, 당신은 무언가를 내게 꺼내 보여 주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은 그저 새로운 것일 뿐이지만 오래된 것은 더욱더 사랑받는다는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매축지에서 태어나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살고 싶다.

 내 젊음이 깃들었던 지난날 나는 데모꾼이었다. 내게는 젊음이 있었고, 부당한 것에 움츠러들고, 타협하며 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를 불의만 보면 맞서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그저 이 세상이 잘못된 것으로 흘러가는 것을 방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곧 내 신념이기도 했다.

 내게 청춘이 있을 때에도 나는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큰 욕심 없이 그저 막걸리 한 사발 할 수 있는 여유만 있다면 더 이상 바라는 것도 바랄 것도 없었으며 그 사실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등학교 시절, 매축지의 뒷골목에 목재소가 많았다.

 그곳에는 미군 부대가 많았기에 미군들의 물자나 53 비행기장으로 비행기가 착륙할 수 있었고 그곳에는 양공주라고 불리는 사람도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매축지에 흑인들이 많아 우리들 용어로는 `연탄`이라고 부르며 놀리고 도망가다가 그들에게 붙잡혀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폭력을 당한 적도 있었다.

 지금의 매축지 고가도로를 만들기 전, 미군 부대에서 땅 속에 폐기 시켜놓은 탱크바퀴나 총알 등이 땅속에 매몰돼 있어서 그걸 파내어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도 있었다.

▲ 이정철 씨의 손에 쥐어진 보물1호 카메라 그가 다시 생명을 불어넣었다.
 땅만 파면 미군들이 폐기시켜놓은 돈이 되는 자재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나의 젊음이 내게 머물러 있던 시절. `수산센터`에서 일을 할 때였다. 그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권변호사를 하던 시절이었다.

 부당한 일을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을 처음 그곳에서 대면하게 됐고, 자세히 보니 그 옆으로는 내가 아는 지인이 한 명 있었다. 그래서 그곳으로 뛰어가 물었다.

 "형님, 여기서 무얼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형님은 데모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순간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대뜸 형님에게 말했다.

 "형님, 데모하시는 분들이 총 몇 명이나 되십니까?"라고 묻자 스무 명 정도 된다고 말을 해 "데모가 끝나면 신천지지하상가에 있는 장어집으로 오시겠습니까?"라고 말을 했고 그들과의 `인연`은 그곳에서 시작이 됐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16대 대통령이 된 이후, 그 당시 함께 데모를 하며 부당한 것에 맞서 싸웠던 이들을 모두 `청와대` 로 초대를 해 대통령을 만나러 가는 영광스러운 순간을 맞이했을 때의 일이다. 힘들게 맞서 싸운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통령은 나를 처음 대면하자마자 "정철이 요새 뭐하노? 밥벌이는 하나?"라는 농담 섞인 말을 내게 던졌다.

 나는 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지금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한 사람을 이곳에 초대해준 것만도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는데 내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인간 `노무현`은 정말 솔직한 사람이었고 심지가 굳은 남자로 기억하고 있다. 대통령 임기 시절 동안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판단은 내게 중요하지 않다만, 내가 전, 노무현 대통령을 인정하는 것은 사람의 인연을… 특히나 높은 자리에 올라간 이후에도 지난날을 함께했던 사람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 인간 `노무현`은 정말 믿음이 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30년동안 골동품들을 수집해온 그에게 모든것은 자식처럼 소중하다.
 말을 이어가다보니, 데모꾼이라는 말이 어감이 이상하다. 다시 `사회운동가`였다고 수정해서 말하고 싶다.

 우리가 큰 권력 앞에 맞서 데모를 했다고는 하나, 모든 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참담한 패배를 맛본 적도 많았고, 우리의 뜻은 보잘것없는 종잇조각처럼 쉽게 구겨지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의 뜻을 꺾지 못한 적도 있었다. 갖은 굴욕과 노력 끝에 희망을 건져올린 기분이었다.

 노무현 대통령과 관련된 사연 중에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에피소드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결혼식을 하게 되면, 노무현 씨가 주례를 해준다고 했었지만 한나라당을 지지하던 사람들로 인해 아쉽게 무산됐던 적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인간 `노무현`을 좋아했던 것이지 그 사람이 무슨 당인지 생각해본 적도 없다.

 나는 사회운동을 하며, 내 뜻을 제대로 펼쳤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열심히 불의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뒤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다.

 가진 것은 많이 없었지만 그들이 조금이라도 힘을 낼 수 있다면 하고 생각을 하고 물품이나 물자들을 사비를 털어 사다 주고는 했었다.

 지금 털어놓는 이야기들이 어쩌면 나를 이해를 못 하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금 더 솔직해져 보려고 한다. 지금의 내 가족, 내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때는 있다. 한번도 딸을 위해 무언가를 해준 적이 없었던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학원에 한 번도 보내 준 적도 없었지만 정말 착하게 잘 커 준 것에 대해서는 너무 감사한 마음도 든다. 인문계를 가봐야 너는 다른 아이들처럼 학원을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실업계를 가서 자격증을 따서 취업을 해라고 추천을 한 것도 나였다.

▲ 30년동안 골동품들을 수집해온 그에게 모든것은 자식처럼 소중하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단 한 번도 후회라는 것은 없다.

 다만, 인테리어 일을 하며 내게는 원인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병이 찾아왔다. 뼈가 썩는 병이었다. 지금 내 몸은 성한 곳이 없다. 내 나이 마흔이었다.

 나는 장애 3급 판정을 받았다.

 지금은 오랫동안 고물상을 운영하며, 오래된 것들을 만지며 사랑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먼지가 쌓여 쓸모가 없어진 물건들이 아니었다.

 여전히 세상에 존재하지만, 그저 불필요에 의해서 버려진 것일뿐이다. 나는 그것들에 애정을 쏟는 일이 좋다.

 50년 세월이 지난 전화기, 축음기, 타자기 이 모든 것들은 그 시대에는 환영받았던 물건들이다. 지금의 시대에 들어서는 고물 취급받고 폐품 취급을 받고 있지만 분명히 그 물건들도 누군가의 손에서는 애정이 깃들었던 것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기에 나는 새로운 물건에 관심이 가는 것보다 오래된 물건들에 더 마음이 쓰인다.

 그것이 지금 내가 가진 나의 자부심일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되살려 내듯, 고장 난 기계들을 다시 내 손으로 살려 놓는 그런 기분일 것이다. 사랑을 받았던 것들이 버려지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찾아올 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내가 아직도 이 세상에 쓸모가 있는 것처럼 이 물건들 또한 그러하리라 믿기에 나는 오늘도 먼지가 쌓인 물건들에 애정을 쏟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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