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9:41 (금)
선택(選擇)에 대하여
선택(選擇)에 대하여
  • 김루어
  • 승인 2014.03.20 19:3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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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 시인
 이 세상에서 한 세월 살아가는 개개인은 누구나 원하던 원치 않던 끊임없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어쩌면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저녁으로 밥을 먹을 것이냐 국수를 먹을 것이냐와 같은 사소한 일상적 선택에서부터 인생을 바꿔 버릴 수도 있는 직업이나 배우자 선택 등과 같은 보다 중차대한 선택에 이르기까지. 사소한 선택은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선택할 수 있거나 얼마간의 비용을 치르고 되물릴 수가 있다.
 하지만, 배우자나 직업선택 등과 같은 보다 중차대한 선택 가운데는 한 번 선택하면, 되물리기가 불가능하거나 되물릴 수 있다 하더라도 값비싼 비용을 요구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설령 어렵게 되물렸다 하더라도 선택 이전 상태로 복원되지 않는 경우가 항다반(恒茶飯)이다. 이는 인생이 일회성이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역설적으로는 선택이 인생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증좌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선택에는 그 선택이 무겁든 가볍든 현명이 요구된다.
 그러면 선택의 기준은 무엇일까? 선택의 기준도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라져 온 역사가 있지만, 크게는 현대와 현대 이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인간사회에서는 어디서나 판단의 기준이 인간의 위상(位相)이듯 선택의 기준 역시 인간의 위상에 따라 달라져 왔다. 현대이전을 지역적으로 양(洋)의 동서로 대별하여 말해보면, 서양은 신 중심 사회였고 동양은 교조적 신분 사회가 될 것이다. 양쪽 다 인간중심사회는 아니었다는 측면에서 이 시대를 신 중심 시대라 부르는 거친 명명에 나는 편의상 동의하기로 한다.
 신 중심이라는 말에는 인간이 피조물이라는 사고(思考)가 깔려있다. 이런 사고는 그 뿌리와 연원이 깊고 오래된다, 동서양 양쪽의 고대신화에 공통적으로 보일 정도로. 피조물의 삶은 당연히 소명의 삶이다. 인간은 소명에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하면 되었다. 잘못되면 그 책임을 조물주에게 돌리면 되므로. 하지만 책임을 돌린다하여 잘못된 선택에서 비롯된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조물주가 인간에게 무관심한 존재라는 발상의 싹이 된다. 노자(老子)용어로 말하면 천지불인(天地不仁)이 되겠다.
 인간의 운명에 무관심한 이러한 조물주의 불인(不仁)은 하이데거 같은 인물에게 조물주를 부인(否認)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인간은 피조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존재(Geworfenheit¹)이다. 이러한 선언은 현대이전과 현대를 가르는 사고의 분기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사르트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은 우연(偶然: contingence²)에서 비롯된 존재이어서 그 존재 의미는 다만 무상(無償:gratuit³)일 뿐이다, 라고. 양자의 명제는 다 같이 조물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전제 위에 서 있음은 물론이다.
 현대인들은 이 명제에 익숙해 있다, 나 또한 그러하지만. 이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는 가정하에 필요한 만큼만 정리해본다면 다음과 같이 요약될 것이다. 인간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졌으며 출생 이전과 죽음 이후는 완전한 무(無)이고 무상(無償)일 뿐이어서, 인간은 무(無)위에 떠 있는 존재이므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불안은 궁극적으로는 죽음에 대한 불안이다. 여기까지는 두 사람의 논리전개에 용어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요(大要)에는 차이가 크지 않다.
 하지만, 불안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라는 방법론에 이르면 양자의 처방은 갈라진다. 하이데거는 유한한 인간에게 이 불안감은 숙명이어서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이 불안과 맞부딪히는 길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고 한다. 맞부딪친다는 말은 인간존재의 근거가 무(無)임을 인정하고, 불안에 허덕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불안을 껴안음으로써, 오히려 불안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즉, 불안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참된 실존, 참된 자기를 찾는 길이 된다, 고 주장 한다.
 이에 비하여 사르트르는 인간존재의 근거가 무라는 뜻을, 인간존재는 그 어떤 것에도 소속되지 않는 절대적 자유 상태라는 뜻으로 읽고, 불안은 인간존재가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이러한 상태에 있기에 생긴다고 본다. 그는 이의 해소방법으로서 참여를 제안한다(참여라는 용어는 문학작품에서는 행동 혹은 선택이라는 용어로도 나타나고 후일 확장되어 참여 문학론의 핵심 개념이 된다). 인간은 어디에도 참여할 수 있다. 참여함으로써만 인간은 무상일 뿐인 자신의 존재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다만, 그 책임은 자신이 져야 한다.
 나는 양 처방 중 사르트르 쪽에 더 기우는 편이다,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시사를 더 많이 주기 때문에. 그의 논리에 기대어 우리가 살아가며 끊임없이 선택을 하는 이유를 더듬어 보자면, 선택은 현재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우리가 눈에 보이게 혹은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행동이 되겠다. 그러면 선택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나는 자유라고 본다. 최소한 내게는 그렇다. 나는 현재 상태보다 더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선택을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선택이 나를 더 자유롭게 해줄 수 있을까를 선택의 첫 번째 기준으로 삼는다.

 注)
 Geworfenheit¹: 피투성(被投性). 영어로는 thrownness.
 contingence²: 우연성(偶然性). 영어로는 contingency.
 gratuit³: 사르트르의 저작, 존재와 무와 소설 구토에 나오는 철학용어. 영역본에는 free, spurious, pointless 등으로 번역되고 있다. 한글번역본에는 無償(무상)이라 옮겨진 일역본이 차용되고 있다.

 (이 글은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조언을 구하는 어느 젊은 독자분의 메일에 대한 답변입니다. 구체적 조언을 구하는데 일반론으로 답변함은 제 역량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선택을 앞둔 분들에게 작은 Tip이나마 되길 바랍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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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관 2014-03-26 10:34:36
선택의 기로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조언이 될 수 있는 글이네요
사람마다 목표가 있고 그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면 몇개의 대안이 도출 되지요
이 대안들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 달성에 최적인 대안이겠지요 한번의 초이스로 달성 못하면 다시 피드백해야 하니 현명한 선택을 위해서 대안들에 대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평가가 필수적일 것이고...

이제 완전 봄이네요

강대선 2014-03-24 15:27:25
자유성..

저는 매번 현실과 이상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는 편입니다.^
어는 한쪽에 깊이 빠졌다고 생각하면 얼른 다른 다리에 힘을 주지요..
기회주의라면 기회주의일 수 있고.
현실주의자라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선택의 경계에 서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제 안에도 자유를 향한 날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끊임없이 날아오르려는 인간의 정신은 멈출 수 없을 테니요..
여기저기서 봄꽃들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hong 2014-03-21 10:32:57
선택..
가지않은길엔 다른세상이 있었을까요?
어느길이었더라도 제 운명은 제것이었을거예요.
그래서 주어진 자신의 길을 가는걸거구
운명이라 모든걸 받아들이게 되는거 같아요.
역행할수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