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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바위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죽어서 바위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
  • 박태홍
  • 승인 2014.03.17 23: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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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호랑이의 중요성은 가죽이고 사람의 중요성은 이름임을 뜻하는 것일 것이다. 호랑이도 죽어서 가죽을 남기는 만큼 사람도 사는 동안 훌륭한 일을 많이 하면 그 이름이 후세에까지 빛나니 살아생전에 선행을 많이 베풀으라는것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는 동안 이름값을 높이기 위해 온갖 노력들을 한다.

 기업이 자기 이름인 고유브랜드를 알리려고 애쓰고 과감히 투자하는 것 또한 이와 같은 원리다. 그러나 그 같은 선행과 업적들이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면 후세에 어떻게 그 사실들을 알릴 수 있겠는가.

 이 같은 연유 때문인지 우리 선조들은 그 기록 문화를 보존하고 계승시키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 흔적들을 남겨왔다. 1377년 직지심체요절이란 책을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도 그렇고 고려시대 대장경판을 만든 것도 기록 문화와 무관하지만은 않다. 직지심체요절을 펴낸 이는 백운화상이며 청주의 홍덕사에서 기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그 내용은 참선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보면 마음의 본성이 곧 부처님의 마음임을 깨닫게 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직지심체요절 즉 직지는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유산이며 공식적 기록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만들어진 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보다 앞선 기록문화는 팔만대장경이다. 12세기 중반 고려시대 몽골군의 침입을 불교의 힘으로 막아보자는 뜻으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대장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해 만든 것이 목판으로 만든 경판 즉 팔만대장경이다.

 이는 활자 인쇄의 신기원과 함께 조상들의 불심과 서적인쇄에 대한 남다른 문화를 보여주며 대장경의 조판으로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기록문화유산을 남겼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기록문화유산은 선사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울주 대곡리의 국보 285호의 반구대 암각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시대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바위벽에 새긴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1971년 동국대 탐사반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문자가 없던 시절 그들의 생활상을 바위에 그림으로 남긴 것이다. 육지ㆍ바다ㆍ호랑이ㆍ돼지ㆍ고래잡이 모습 등을 암벽에 그림으로 남겨 그들의 생활상이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온 서시. 또는 서불의 행적에서도 기록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서시과차(徐市過此)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고 쓰여진 글이 제주도ㆍ남해도ㆍ여수 월호도 등의 바위에 새겨진 것이 오늘날까지 현존해 있는 것이다. 바위에 새겨진 글은 영구 가능할 만치 오랜 세월을 지탱할 수 있다. 진주에도 암벽에 무수한 이름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불의 행적기록과는 달리 이름만 새겨져 있는 것이 이와 다를 뿐이다.

 진주성 촉석루 아래 남강 절벽에 새겨진 40여 개의 이름들이다.

 이곳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공들이 왜 이토록 위험한 절벽에 이름을 새겼는지 알 수는 없다. 또 하루 이틀에 걸쳐 이름을 새길 수도 없으며 장비가 부족했던 시대적 상황을 유추해 본다면 목숨을 건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촉석루에서 남강으로 내려가는 길목 상단 바위에 새겨진 5명의 이름이 눈길을 끈다.

 왼쪽부터 김재은(金在殷), 채규상(蔡奎常), 정일용(鄭鎰溶), 한규설(韓圭卨), 한규직(韓圭稷) 순으로 돼 있다. 동서대 하강진 교수에 따르면 이들은 18세기 중반에서 19세기 초까지 진주 또는 인근 지역의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이라는 것이다.

 이중 한규설이 진주와 연관이 있다.

 1884년 진주성에 소재한 경상우병영 경상우병사에 부임, 1년 4개월을 재임했다는 것이다.

 이때 한규설은 선정을 베풀고 창렬사를 중건하는 등 많은 치적을 쌓아 주민들이 비봉산 아래 치적비까지 건립했다고 한다.

 이 치적비는 현재 진주성 내 비석군에 위치해 있다. 이 때문인지 한규설의 형으로 밝혀진 한규직도 함께 이름을 새긴 것으로 유추된다. 이 외에도 바위에 새겨진 40여 명 중 29명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절벽 위에 새겨진 단순한 이름이라 할지라도 흔적의 기록이다. 이들의 살아생전 삶을 되찾아 보는 것 또한 우리들 후손들이 해야 할 일 아닌가. 그리고 단순하게 절벽 바위에 새겨진 이름일지라도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또한 재조명해 볼 일이다.

 이들이야말로 죽어서도 이름을 남긴 후회 없는 삶을 살다간 영혼들인지 아닌지는 후손들이 풀어야 할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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