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7:06 (화)
감춘부(感春賦)
감춘부(感春賦)
  • 김루어
  • 승인 2014.03.13 18:53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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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은 젊은이들의 계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봄이 기다려진다.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봄이 되면 나이 먹은 이들도 다시 젊어지는 기분이 되는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봄으로 가는 길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삼월 때문이다. 일 이월은 겨울이어서 그렇다 하지만, 개구리 깨어나 봄으로 가는 겨울의 마지막 장애물을 걷어낸다는 경칩(驚蟄)이 월초에 있는 삼월의 날씨도 겨울 못지않게 심술궂다. 봄인듯하면서도 봄이 아니기 때문이다.
 햇살이 따뜻하여 이제 봄이구나 하는데, 문득 한풍이 몰아쳐 겨울로 돌아갈 듯 변덕을 부릴 뿐만 아니라, 때로는 부슬부슬 비가 내려 마음을 산란하게 하기도 한다. 이런 날씨를 두고 사람들은, 물러가던 겨울이 꽃이 망울을 맺는 것을 시샘하여 해코지를 하는 날씨라 하여 꽃샘날씨라 이름 붙였다. 하지만 이런 겨울의 마지막 심술도, 아지랑이처럼 여리지만 니엄니어 오는 어여쁜 봄을 결코 가로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봄은 가로로뿐만 아니라 세로로도 오기 때문이다.
 집 밖으로만 나가보아도 안다; 봄은 꽃샘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미 와 있거나 느욱하지만 니엄니어 오고 있음을. 그렇다. 골목 가로수에는 이미, 여리지만 파릇하니 물이 오르고 있고, 동네공원에서 뛰노는 아이들 까르르 웃음소리는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르고, 행인들 발걸음은 경쾌해지고 입성은 눈에 띄게 가벼워져 간다. 나는 이런 봄 속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이 봄에 새로 태어나는 생명들의 숨결과 몸짓을 내 눈으로 보고 직접 느끼고 싶어…….
 봄은 자연이 태어나고 자라고 꽃피는 계절이다: 모든 잎을 잃고 겨우내 찬바람에 떨며 서 있던 가로수의 딱딱한 표피를 뚫고 나온 여린 새잎, 대로변 녹지에 봉오리 진 채 곧 터질 듯 부풀어 오른 노란 산수유, 어느 집 담장을 넘어온 만발한 매화가지… 나는 감전된 듯 이들 앞에 걸음을 멈춘다. 인생 사 분의 삼 기점을 넘어가는 내 눈에는 이들 가운데 어느 하나 가슴 저밀 만큼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다. 이런 가슴 저밈은 고(古)와 금(今)이 다름이 없었던지 어느 고대 시인은,   
 해마다 피는 꽃은 서로 비슷한데 (年年歲歲花相似) 그 꽃을 보는 사람은 해마다 다르네 (歲歲年年人不同)
 라고 노래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비적 효과에 성공한 것 같은 이 명구는 비유오류(比喩誤謬)일 뿐이다. 왜냐하면, 해마다 피는 그 꽃은 비슷(似)할 뿐 같은(同)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꽃도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자명성을, 시인이 착시를 유도하는 언어로 호도한 것일 뿐이다. 물론, 풀꽃이나 나무 꽃 가운데는 한해살이가 아니라 여러해살이가 있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하면 다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 갱신(更新)일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식물의 이러한 자기 갱신에 무한한 감명을 받는다. 이러한 자기 갱신은 시골에서 좀 더 선명하게 볼 수가 있다. 내가 시멘트로 덮이고 공해와 매연에 찌든 도심을 무단히 벗어나 시골로 가곤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도심을 벗어나 들 앞에만 서도 공기가 다르다. 들길을 걷다 발아래 파르라니 눈을 끄는 것이 있어 쪼그리고 앉아 살펴보면 시든 잡풀 속에 내 손톱보다 작은, 어리고 여린 것이 겨우내 얼어붙었던 두터운 흙을 밀어내고 순을 올리는 것을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이란!  
 어디 그뿐일까? 얼어붙었던 시내가 녹으면서 흐르는 물소리, 시내에 드리워졌던 마른 버들강애지가 눈뜨는 몸짓, 관목 덤불 밑에 숨어들었던 작은 새들이 날아오르는 소리, 그 아래 숲들이 연초록으로 몸 트는 소리… 삼월의 들과 산에는 이처럼 새로 태어나고 자신을 갱신하는 자연의 소리와 몸짓들로 가득하다. 지난겨울 함께 움츠려 들었던 우리는, 작고 여리디여린 싹 하나라도 그냥 쉽게 피어나는 것이 아님을 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연에서 곧잘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고는 한다.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은 인간의 거울이다. 그런데 나는 감수성이 민감한 성장기를 농촌에서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에는 자연이라는 거울에 나를 비춰 볼 줄 몰랐다, 설령, 비춰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돌아서면 바로 잊어버리고 말았다. 아마, 도시로 도시로만 달아나고 싶었던 헛된 열망에 몸 달아 있었기 때문일 터였다. 내면에서부터 열망이 시들어가는 나이가 되어서야 자연이라는 거울이 눈에 보이는 삶을 살아온 사람은 슬픈 사람이다. 슬프게도,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뒤늦은 자각은, 역설적이게도 나이 먹어 갈수록 봄이, 삼월이 내게는 안타까우리만큼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삼월에 길을 나서면 꽃샘추위에 몸을 떠는 작은 풀꽃 앞에서, 가로수의 새순 앞에서, 노랗게 피어오르는 녹지의 산수유 앞에서도 걸음을 멈춘다. 하지만 그네들은 꽃샘추위 따위는 두려워 않는다, 비록 한 두잎 새순이나 혹은 한 두송이 꽃을 잃을지라도. 왜냐하면, 태어나려는 열망과 새롭게 자신을 갱신하려는 열망으로 그 속이 너무나 뜨겁기 때문에.
 내게는 이들이 거울이다. 인간이나 자연 어느 쪽에도 무한한 삶은 없다. 다만 길이의 장단이 있을 뿐. 하지만 장단의 문제는 생명체의 소망밖에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건강한 삶이고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이냐, 는 질(質)의 문제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는 자연이 인간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네들은 어느 한순간이라도 태어나려는 열망으로 뜨겁지 않을 때가 없고 새로워지려는 열망으로 자신을 갱신하는데 한순간이라도 게을리하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들이 거울이다.
 *니엄니어 : 잇달아의 중세어
 *느욱하지만 : 느리지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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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2014-03-17 14:54:29
자기 갱신의 몸부림의 3월은 뜨거워지고 있나 봅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자기 갱신의 시기는 언제일 지..
세 번의 기회란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적어도 세 번은 자기 갱신을 해야할 것 같은데..
제 삶을 돌아보면 그래도 한 번은
갱신의 기회를 거치지 않았나 하는 자위를 해 봅니다..
나머지 두 번은 언제일지..혹
지금이어야 하는데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용기를 못 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기 갱신에 바쁜 3월에...

한정호 2014-03-16 21:37:40
자연이 보인다는건 비로서 마음의 눈이 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려면 그만큼의 시간속에 잉태된 생각들이 자리해야하겠지요.
자연에 다가가기에는 산다는 이유로 너무도 다양한 현실들이 있기에
그현실속에서 우리는 자연을 지나치곤 하는것 같습니다.
옷을 입고 벗고하는 자연일뿐인데 우리는 많은 복잡함이 덧칠해져 있는것 같아요.
그래도 내면에서 꿈틀거리는 느낌은 자연을 닮아 가려는 마음인가합니다

이서윤 2014-03-14 15:53:46

글만 봐도 아지랑이 피어오릅니다
변덕스런 일기로 신심에 시련을 주기에 이름답지 않게 좋지않은 계절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설레는 것은 다 같을 것입니다

전 지금 봄감기를 안았답니다
환절기인것을 진즉 알고 있어 몸은 지쳤지만 곧 피어날 자연들의 짙푸른 색을 기다리면서
같이 지내고 있답니다.
환절기 감기 조심하십시오^^

임종관 2014-03-14 14:36:27
우울한 겨울을 보내고 희망과 용기를 갖고 다시 일어서려는 저에게 이번 수필은 큰 힘이 됩니다 시인님의 글은 항상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온유한 글이지만 그 물밑에는 삶에 대한 뜨거운 애정이 있는 글입니다 정말 고맙게 읽고 있습니다 계속 좋은 글 부탁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