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20:14 (수)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3.04 23: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억의 삼천포 시절(83)
 그리고 전국 각 총판으로 잡지를 발송했다. 그러나 잡지 내용이 옛날과 같지 않고 왜색 일변도라, 전 국민이 볼만한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서점에서 만화잡지가 사라진지 십년이 넘어서자, 잡지는 시원스럽게 판매되지 않았다. 또 대여점으로 보급하려 했지만, 점주들이 ‘합동’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계약해주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도 2호를 출간한다. 2호 역시 성적이 미진했다. 억지로 3호까지 발간하지만, 수입이 없어 다음 회는 제작을 못 할 형편이 된다.

 엎친 데 덮친다든가. 선생님의 일을 돕던 친구 한 분이, 출판사의 정보를 빼내 어떤 부자를 구슬려 만화 출판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선생님의 판매 루트에 혼선을 가져와서 자금 조달이 더욱 어렵게 된다.

 결국, 집까지 팔아 거창하게 시작한 계획은 꽃도 피우지도 못하고 끝을 내고 만다. 만화 황금 시절은 불이다. 불을 좇던 불나방은 불 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불을 가지기는 고사하고, 자기 몸만 불타 버린 것이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다. 나는 천호동에 살면서 한국일보 출판국에서 ‘최수정’이란 필명으로 순정 작품을 했는데, 원고가 끝나는 날이면 다른 작가들 만나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고달픈 인생사를 이야기하곤 했는데, 어느 날 그 자리에 박 선생님도 참석하셨다.

 그때의 선생님의 모습은 황금 시절 기세등등한 모습이 아니셨다. 황금 시절 부활에 의욕을 가지신 모습도 아니었다. 그저 원고를 그려 한 달을 겨우 살아가는 2급 만화가의 모습이셨다.

 몇 잔을 마신 선생님은 급한 일이 있는지 먼저 일어 나셨다. 나는 선생님에게 “선생님. 용기를 내십시오”하고 인사를 건넸다. 선생님은 대답 대신 고개만 흔드셨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는 뒷모습은 너무나 쓸쓸해 보였다. 그 뒤로 나는 삼천포에 일년 있다가 다시 올라와서, 선생님이 타계하셨다는 소문을 듣게 된다.

 64. 아빠를 그리는 탤런트

 또 세월이 흘렸다. 내가 코엑스 전시관에서 박광현 선생님의 사모님을 만나뵌지 7~8년이 지났을 무렵이다. 그때 나는 사단법인 한국만화협회에서 협회 이사로, 또 위원장으로 다년간 일을 봐오던 시절이었고, 이제 협회 일을 볼 처지가 못되어 슬슬 손을 뗄 무렵이었다. 그 무렵에는 문화관광부에서 해마다 한국 만화에 공이 많은 작가에게 공로상을 주었는데, 그 해에는 박광현 선생님이 선정되셨다.

 박광현 선생님에게는 슬하에 1녀 2남을 두셨는데, 맏이가 탤런트 박원숙 씨였다. 시상식에 유가족으로 박원숙 씨가 나와야 하는데 일정 때문에 나오질 못하고 따로 날짜를 잡아 임원진과 몇 분을 모시고 간이 시상식을 했다.

 박원숙 씨는 다소곳이 웃음 짓는 모습이 드라마에서 보던 앙칼진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소문으로는 박원숙 씨가 아버지를 기리는 마음으로 해마다 만화가 몇 분을 초빙해 근사하게 대접하겠다고 마음을 먹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몇 번 모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또 박원숙 씨는 어릴 적 아버지를 기리는 글을 썼다. 내용은 붓을 사러 인사동에 갔던 이야기, 세종 호텔 파친코에 갔던 이야기 들을 담고 있었다. 박원숙 씨에게는 여유있고 따스한 아빠로 비쳐지고 있었다. 사모님의 ‘지긋지긋하다’는 회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원숙 씨가 어릴 적 선생님은 황금 시절 잘나가던 만화가였다. 경제적으로 아무 어려움이 없었던 시절이라 좋은 모습만 보여온 것이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부천 만화 정보센터에서 박광현 선생님 추모 전시회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어린 손주(?)를 데리고 나왔었다. 박원숙 씨에게는 아버지 박광현 선생님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였다. 보고 싶고 그리운 대상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