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0:13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3.0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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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81)
 그러자 사모님은 너무나 뜻밖에 “그 지긋지긋한 만화들은 남편이 죽자마자 모두 불살라 버렸다오”라고 하셨다. 나는 ‘아불싸! 우리나라의 보물들이 그렇게 없어졌구나’라는 생각에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만화가 지긋지긋했다니…. 그게 무슨 뜻일까? 박 선생님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길래 사모님이 저런 말을 하실까. 나는 그 뜻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사모님은 이제는 만화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산다고 하셨다. 그리고 고생담을 몇 마디 하시고는 박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는지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여운만 남긴 채 쓸쓸히 떠났다.

 62. 만화계 뒤안길에서…

 내가 박광현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63년, 충무로에 있는 어느 만화 인쇄소 사무실에서였다. 나는 1962년에 만화를 그리려 서울에 상경해 유세종, 하영조 선생님의 문하생으로 있다가, 다시 하영조 선생의 소개로 회현동에 있는 미문 출판사에서 ‘황구의 결투’라는 작품을 창작할 때였다.

 왜 인쇄소 들렸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그 인쇄소 사무실에서 전지만 한 철판을 앞에 두고 만화 표지 분판 작업을 하는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박광현 선생님이셨다.

 불과 2~3년 전만 해도 한국의 최고의 실력자, 최고의 인기 작가였는데, 만화를 안 그리고 인쇄소 분판 작업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 나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께 다가가서 “저는 미문 출판사에서 작품을 시작한 최경탄입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선생님은 작업을 멈추고 나를 유심히 보더니 하시는 말씀이 “만화를 그릴 얼굴이 아닌데”라고 하시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잠시 만화 그리는 얼굴은 따로 있는가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이어 “정말 만화 그려볼 텐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예. 저는 만화를 계속 그릴겁니다”라고 대답했다. 내 말에 선생님은 “그래 무슨 일을 하든지 끝까지 해야 한단다. 열심히 해보아라”고 말하고 다시 고개를 돌려 작업에 집중했다.

 그 당시 출판 작업에서 표지에 색을 넣어야 하는 데, 한국에는 색의 명암을 넣는 기술이 없었다. 그래서 색깔이 연하고 진한 부분은 가는 망으로 된 판을 인쇄하는 판 위에 올려놓고 그 망 위에서 솜 같은 것으로 도장 찍듯이 찍어 명암을 표현했는데, 그 작업을 분판 작업이라 불렀고 선생님은 그 작업에서 한국 제1인자였다.

 선생님은 인쇄소 분판 작업 외에도 다른 작가들의 만화표지도 대신 그려주고 계셨다.

 1960년, 나라의 명에 따라 만화 출판사가 모두 폐간이 되고 서점용 만화는 없어지고, 만화라고는 달랑 골목에나 있는 만화대여점만 남게 되자, 모든 만화작가들은 만화대여점 만화작가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선생님의 체질에는 맞지 않으신 듯했다. 꼼꼼히 그린 원고의 고료는 잡지보다 반의반이나 싸게 책정되고, 또 대여점에서는 독자들이 초등학생 정도의 어린이들이라 수준 높은 박 선생님의 작품은 지루한 것이었다.

 그래서 인기마저 하락하자, 선생님은 그것보다 다른 작가의 표지를 그리고, 인쇄소에 분판 작업하는게 더 속 편하고 수입도 낫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이런 생활을 하시는 박 선생님 사무실에는 늘 인기 없고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이 몰려오고, 선생님은 그때마다 그분들과 어울리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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