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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발굴 외길 21년
독립운동가 발굴 외길 21년
  • 이명석 기자
  • 승인 2014.02.26 0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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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상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
▲ 정재상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항일투사 259명의 학살문건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항일 투사 수백명 학살 문건 찾아내
100여명 독립운동가 건국 훈장 도와

 최근 독도 영유권과 위안부 할머니에 대한 망언 등 일본의 우경화와 군국주의로의 부활이 우려되고 있는 가운데 항일투사 259명 학살문건 발굴과 독립운동가 선양사업의 외길 인생을 걸어온 한 향토사학자가 있다.

 그가 바로 정재상(48ㆍ악양면) 하동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장(경남독립운동 연구소장)이다.

 그는 최근에는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의 문건을 발굴ㆍ공개하고 ‘지리산 항일투쟁영웅 류명국ㆍ양문칠’ 전사를 발간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항일투사 259명의 학살문건’을 찾아 신원이 확인된 41명의 의병장을 정부에 서훈 신청(지난 2월 4일 진주보훈지청 통해)했다. 지금까지 그의 노력으로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가 건국훈장을 받았다. 본지는 3ㆍ1절을 앞두고 그를 만났다.

 - 언제부터 어떤 계기로 독립운동가 발굴에 나서게 됐나?

 “92년 대학을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93년 지역 주간신문 기자로 일했다. 그해 광복절을 맞아 특집으로 지역 독립운동가를 조명하는 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한말 을사늑약(1905년)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체포돼 총살당한 박매지(박인환) 의병장의 기록을 하동군사를 통해 알게 됐다.

 그런데 군사에는 박매지 의병장에 관한 내용이 단 한 줄에 불과했습니다. 기록에는 ‘일본군에 체포돼 귀순의 권유에 불복하다 총살됐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뿐만 아니라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못했고 이 내용만 가지고서는 어떤 기사도 쓸 수 없었다.

 그 후 어느 신문에서 박매지 의병장과 함께 활약하다 체포돼 종신형을 선고받고 9년간 복역한 함양 출신 권석도 의병장의 항일기록을 찾게 됐다.

 다음 날 함양의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를 찾아 당시 권석도 의병장의 기록을 서훈 신청했던 분이 누구인지 알게 됐다. 그분은 함양이 아닌 서울사람이었다.

 서울 올라오기 전에 약속한 권석도 의병장 기념사업회 정준영 선생을 이경규 선배와 함께 만나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정준영 선생은 저와 함께 직접 국가기록원을 찾아 박매지 의병장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박매지 의병장은 그 후 몇 년 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 최근 항일투사 117인과 이번에 259명의 학살문건을 어떻게 찾게 됐나?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국내에서는 의병장들의 문집류와 국가기록원, 대학도서관, 문화원, 읍면 사무소 등을 통해 자료를 수집한다.

 이번 문건은 국가기록원자료인 폭도에 관한 편책과 LH토지주택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진중일지(일본군 보병이 작성) 조선주차군 사령부에서 편집한 조선폭도 토벌지 등에서 찾게 됐다.”

 - 그렇다면 폭도에 관한 편책과 조선폭도 토벌지, 진중일지는 어떤 기록물인가.

 “한마디로 의병을 탄압한 일본 측의 자료이다. 폭도에 관한 편책은 총 121책의 방대한 양으로 의병에 관한 보고서를 월별로 경무국에서 편책한 일본 측의 의병탄압 일지이다. 현재 국가기록원과 국사편찬위원회에 각기 소장돼 있다.

 그리고 조선폭도 토벌지는 1913년 조선 주차군사령부가 편집한 자료다. 진중일지는 1907년부터 영ㆍ호남지역 의병학살에 참여한 일본군 보병 12사단 14연대에서 작성한 것으로, 총14권으로 돼 있으며 1907년 7월 23일부터 1909년 6월 19일까지 2년간의 기록이다. 2010년 최근에 입수된 자료다.”

▲ 하동문화원 정재상 향토사연구위원장이 서훈 신청한 항일의병장 41인의 자료.
 - 항일투사 117인과 259인 학살문건에 관해서.

 “하동 옥종에서 전사한 항일투사 117인은 한말 을사늑약 이후 1907년부터 1909년 말까지 지리산일대인 하동, 산청, 함양, 진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수차례 격전을 치르다 일본군의 지리산 대 토벌 작전 때 전사한 무명 항일투사이다.

 이분들은 경남창의대 소속으로 산청출신 박동의 대장과 경북 영천출신 이학로 의병장, 류명국ㆍ양문칠 의병진에서 활약한 인물입니다. 그리고 학살당한 항일투사 259인은 강원도 출신부터 영호남 출신의병장으로 이분들도 1907년부터 1909년 사이 일제의 남한 대 토벌작전 때 일본군에 체포돼 희생된 분들이다.”

 - 이중에 공적이 가장 뛰어난 분을 한두 분 소개한다면

 “항일투사들의 나라사랑정신과 민족애를 생각하면 이분들의 공훈의 높낮이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굳이 이야기를 한다면 하동의 정승유 의병장과 전남 곡성의 손학곤 의병장, 전북 장수출신의 박재근 의병장을 들 수 있다.”

 - 지금까지 몇 명이나 찾고 몇 분이 독립유공자로 인정 받았나?

 “아마 500명이 넘지 않나 생각된다. 그 중에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훈ㆍ포장을 받은 분은 100여 명쯤 된다.”

 - 독립유공자 발굴 외에도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일을 많이 한 것으로 아는데.

 “지리산 항일투사기념탑을 하동군 악양면에 2008년 건립했다. 이 기념탑에는 지리산 일대에서 일제와 맞서 싸우다 전사 순국한 대표적 항일의병장 335인과 무명항일투사의 활약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당시 기념사업회장을 맞아 일을 추진했는데 지리산 인근 영호남 지역 17개 시군민이 참여해 기념탑을 건립했다. 그리고 지리산 화개 의신에서 순국한 무명항일투사 30인 의총비를 하동군의 도움으로 2011년 세웠다.

 2004년에는 독립투사의 활약상을 다룬 EBS 다큐멘터리 ‘독백’을 제작방송했고, 2007년에는 KTV스페셜 ‘이름 없는 독립전사를 찾아서’를 제작, 현충일과 광복절에 각각 방송했다.

 2000년에는 ‘하동의 독립운동사’를 발간했고 최근에는 ‘지리산 항일영웅 류명국ㆍ양문칠 장군’의 전사를 발간했다.

 지금은 ‘지리산 항일투쟁사’를 집필 중이며, 류명국 기념사업회장을 맡아 ‘류명국 의병장 공훈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 그동안 독립운동가 발굴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많은 경비가 소요됐을 텐데.

 “경비보다는 오히려 노력이 많이 들었다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독립운동가 발굴을 하면서 오직 나의 사명감으로 이일을 해 왔다. 세상에 태어나 남을 위해 한 가지 의미 있는 일은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하고 있다.”

 - 그렇다면 경제적인 일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양봉을 하고 있다. 봄이 되면 사천에서 경기도 안성, 강원도 철원까지 대한민국을 1년에 한 바퀴씩 돌고 있다. 큰 수입은 안 되지만 먹고는 산다.”

 - 독립운동가 연구 등의 공적으로 여러 가지 많은 상을 받은 것으로 아는데.

 “정말 제가 한 일에 비하면 너무도 과분한 상을 받았다. 2007년에는 국가보훈문화상과 향토문화상을 받았고, 2011년에 하동군 군민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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