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8:22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24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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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77)
 조선인 노무자들은 해방된 조국에 가기 위해 이 귀국선을 타게 된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모든 것을 접고 귀국선을 탄 것이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 형제 찾아서 몇 번을 울었던가 타국살이에… 몇 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내라. 흘러라 귀국선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 동포 찾아서 꿈마다 찾았던가 삼천리 강산, 꿈마다 빌었던가 우리 독립을, 비바람아 그쳐라, 구름아 날아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날이 크다.’

 귀국선 노래처럼 감동적이었다. 장주사님의 큰아들도 일본의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키시마호’에 승선한다.

 일본 정부는 정원이 4천명인 배에 무려 7천명이나 태운다. 귀국선은 부산으로 출항하고 교토부 마이즈루만 해상에서 갑작스러운 폭발로 배가 두 동강이 나고 많은 승선자가 물에 빠져 사망하게 된다.

 일본 당국에서는 ‘미국인이 깔아놓은 기뢰에 부딪혀 폭발했다. 3천725명 승객 중 524명이 사망했고, 일본인 승무원 255명 중 25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구사일생으로 생존한 사람들은 이때 사망한 사람들이 5천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는 부산까지 갈 연료도 없었고, 폭파 직전에 일본인 승무원 255명이 비상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고 말했다. 또 마이즈루만에 설치된 미군의 기뢰는 이미 철거된 후였다고 한다.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우키시마호’ 사건의 인명 피해와 폭발의 진상은 세기의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한국인 피해자들은 이 사건을 물어 일본 정부에 2001년, 2003년 배상 문제로 재판했지만 모두 패소했다. 또 1950년 ‘우키시마호’ 인양 작업을 하던 일본 당국은 돌연 인양 작업을 중단하고 만다. 이 사고로 장주사님의 큰아들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58. 장주사님의 가슴 아픈 사연

 장주사님의 부인은 막내딸인 진희 고모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때 지역 내 유지는 물론, 문상객들의 조문행렬이 십리나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큰 초상을 치른 후, 아내 없이 어린 두 딸을 키워야 했다. 게다가 얼마 후 큰아들이 일본인 며느리와 두 손주를 맡겼다.

 두 딸과 두 손주를 맡은 장주사님은 그래도 며느리가 있어 버틸 수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청천의 날벼락인가. 나라가 해방되고 큰아들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기뻐했는데, 돌아오는 귀국선이 침몰해 큰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그 후 사랑하는 아내와 기둥 같은 자식을 잃은 장주사님은 사는 것이 정상이 아니었고 만사가 짜증뿐이었다.

 일본인 며느리는 타국에서 두 아들과 두 시누이를 키워야 했다. 남편이 살아있을 적에는 견디고 살아왔지만 남편이 죽자 입장이 달라졌다. 말이 안 통하는 타국, 시아버지의 잔소리, 두 아들의 양육, 게다가 어린 시누이들까지 돌봐야 하는 입장이 되자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자기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장주사님은 앞날이 더 깜깜해졌다. 자기 딸도 키우기도 벅찬데, 두 손주까지 키워야 한다니… 며느리가 너무 무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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