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01:44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23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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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76)
 나는 그 앞을 지나면서 무심코 대문이 있는 골목길로 고개를 돌렸는데, 때마침 대문 앞에서 장주사님이 긴 빗자루로 골목을 쓸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걸음을 장주사님을 노려보았다.

 장주사님도 신경이 쓰이는지 나를 쳐다본다. 몇 초가 지났을까. 나는 눈을 먼저 돌리지 않았고 장주사님도 눈을 떼지 않았다.

 나는 며칠 전 손목을 잡혀서 고생한 것이 생각났다. 또 자기 손주에게 유자도 못 따먹게 하는 심술 궂은 할아버지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리고 시내에서 장주사님이 꽤 고집스럽다는 소문도 떠오른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장주사님에게 “이 고집쟁이 할배!” 하고 고함을 질러버렸다. 그러자 장주사님은 “뭐라고 이노무 자식이. 게섯거라!”하면서 빗자루를 내던지더니 나에게 달려온다.

 나는 준비를 하고 있다가 곧장 도망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달려오는 것은 진돗개가 달려오는 것보다 훨씬 느리다. 그러나 진돗개는 한 번 물리면 끝이지만. 이 고집쟁이 할배에게 붙들리면 종일 꼼짝없이 고생할 거라고 생각하니 속도를 줄일 수가 없었다.

 한참 달리다 보니 장주사님이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는 땀이 비오 듯 흐르고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그래도 화풀이를 조금 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나는 그 뒤로도 이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한두 번 더 벌렸다. 그러는 사이에 엉어리진 것이 다 풀리고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 내가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장주사님이 나 때문에 진짜 화가 났다면 우리 집까지 따라와서 아버지에게 화를 냈을 것이다. 삼천포 시내 어른들은 나 때문에 화가 나면 꼭 우리 집까지 찾아오고는 했다. 누구든 ‘로타리 옆 작은 양복집’이라 하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천석꾼 할아버지 장주사님께는 말 못할 사연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고집도, 또 손주들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게 아닐까….

 57. 귀국선의 참사

 세계에서는 해상 사고로 인명피해가 가장 큰 사건으로 ‘타이타닉호’ 사건을 뽑는다. 거의 1천명에 달하는 인명피해였다. 그러나 이보다 5배의 인명피해가 났던 어마어마한 해상 사고가 있었고, 그 피해자가 모두 한국 사람인 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엄연히 존재했던 큰 사건인데도 많은 한국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1945년 8월 22일. 일본 오미나토 항구에서 4천730t의 일본 해군함 ‘우키시마호’가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7천명을 태우고 부산항으로 출항하다 교토 부근 마이즈루만 해상에서 갑작스런 폭발음과 함께 침몰한 사건이다.

 먼저 타계하신 장주사님의 큰아들은 일제강점기 때 삼천포 제일의 인텔리(지식층)이셨다.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왔고 그 당시 삼천포에 초등학교 외 상위 교육 기관이 없었는데, 뜻있는 분들과 의기투합해 삼천포에 중고등학교를 설립한 주 멤버였다. 이분은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일본 여인을 만나 아들 두 명을 낳았는데, 애국심이 강했던 그분은 이름도 충국(忠國), 충정(忠貞)으로 지었다. 그리고 아들과 부인을 삼천포로 데려와 아버지인 장주사님 댁에 맡기곤 일본으로 다시 돌아가 사업을 하게 된다.

 그러는 사이 나라가 해방됐다. 일본 정부는 일본에 기거하는 조선인 노무자를 모두 조선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일본 해군 함 ‘우키시마호’를 준비해 조선인을 귀국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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