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8:56 (목)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18 22: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추억의 삼천포 시절(73)
 54. 유자 서리 누명

 우리나라에서 제일 귀하고 비싼 과일은 유자 열매다. 흔히 길에서 팔거나 다방에서 주스 만드는 유자는 탱자나무에서 접붙인 것으로 귀한 것이 못 된다. 여기서 말하는 유자는 유자나무에서 열리는 진짜 유자를 말한다.

 유자 중에서도 남해나 삼천포에서 나는 유자가 전국에서 최고이다. 아니 세계에서 최고의 명품이다. 유자는 신맛이 많아 아주 조금 먹더라도 열 번 정도 얼굴을 찌푸리고 침을 있는 대로 모아야 먹을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도 귀한 이유는 그 냄새, 즉 향기 때문이다.

 유자 한 개를 손에 쥔 사람은 절대로 그냥 먹는 법이 없다. 가지고 다니면서 냄새를 맡고 또 맡아보고 삼일 정도는 그렇게 냄새를 맡아보고 다니다, 싫증이 나고 냄새가 연해지면 그제야 껍질을 벗겨 얼굴을 찌푸려 대면서 먹곤 한다.

 그런데 이 유자가 5~8개 정도 달린 가지를 구하면 그것은 누구든지 반드시 방에 걸어 놓는다. 그러면 그 향기가 집 전체에 풍겨 기분이 좋고, 온 집안이 산뜻해진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이후로는 진품 유자를 가져 본 적이 없지만, 삼천포 살던 시절에는 종종 내 손에 귀한 유자가 들려지고는 했고, 또 어떤 때는 유자가 5~7개나 달린 가지를 손에 쥐고는 방에 걸어 놓기도 했다.

 그때 우리 집에 잠깐 다녀가신 시골 친척이나 친하게 지내시는 분들이 자기 집 유자나무에서 딴 유자를 선물로 준 것이거나, 내가 시골 친척 집에 놀러 갔다가 받아 손에 쥐어진 것들이다.

 지금도 삼천포에는 유자가 귀하다. 가끔 시장에서 유자를 20~30개 정도 든 바구니를 놓고 파는 아주머니가 있는데, 그곳에서 유자 한 알을 1만 원 이상 받기도 한다. 유자는 그 정도로 귀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장주사님 작은 손주 충정이 형이 나에게 와서 “부진아, 우리 집에 유자 따러 가자!”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충정이 형집, 즉 장주사님 집은 옛날 고래등 같은 한옥집인데, 대문 안에 커다란 유자나무가 담 넘어까지 뻗어있고 유자가 해마다 오백개도 더 열리는 명품 나무였다. 나는 그 유자나무를 항상 봐왔기 때문에 그 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오늘 또 유자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유자 가지가 생길 거라고 생각하니 벌써 흥분됐다.

 나랑 충정이 형은 골목으로 들어가 충정이 형 집까지 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형은 자기 집인데도 나를 대문 밖에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가 긴 장대를 가지고 나오더니, 밖에서 집안의 유자를 따는 것이다.

 누가 봐도 유자 임자가 유자를 따는 게 아니라 서리꾼이 유자를 따는 광경이다. 그래도 나는 형을 믿고 유자 따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다. 아직 따지 못하고 나무만 흔들어 대고 있는 순간인데, 충정이 형이 갑자기 장대를 나에게 맡기더니 ‘후다닥’ 도망을 치는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집안에서 덩치가 큰 장주사 어른이 나오시더니 내 손목을 불끈 잡고 “이노무 자식, 오늘 잘 잡혔다”하시는 게 아닌가. 이게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날보고 유자 도둑이라니…. 나는 내 손을 잡고 있는 할아버지 손을 비틀어 보지만 꼼짝도 않는다.

 나는 “유자는 내가 딴게 아니라 충정이 형이 땄다 말입니다”하고 변명했지만, 할아버지는 “이노무 자식 거짓말하는 것 보게, 장대를 들고 따는 것을 봤는데도!”하면서 내 손을 놓아 주지 않고 나를 끌고 자기 집으로 들어간다. 낭패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