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8:34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13 23: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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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70)
 의사들은 자리를 옮겨 쇠줄이 아저씨를 돌봤지만 아저씨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그 상태로 쇠줄이 아저씨는 침대에 누워 하루를 견뎠지만, 그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셨다. 박용도 아저씨에게 진 빚을 죽음으로서 갚으신 것이다. 쇠줄이 아저씨의 마지막 말인 “이렇게 죽는 것이 징용에 끌려가 죽는 것보다 낫지 않소” 이 말의 뜻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박용도 아저씨의 은덕 덕분이라 생각하신 것이다. 그래서 죽음도 불사하고 박용도 아저씨를 살려내신 것이다. 그때 강직한 박용도 아저씨도 쇠줄이 아저씨의 죽음에 너무나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우리 동네에서는 그렇게 쇠줄이 아저씨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나는 몇 달 후에 박용도 아저씨는 건강을 되찾아 거리에 다니시는 것은 보았지만, 쇠줄이 아저씨는 영영 우리 동네에서 볼 수가 없었다. 나의 영웅이셨던 아저씨는 젊디젊은 나이에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하셨다. 세월이 흘러 60년 후 지금 삼천포 시내에는 쇠줄이 아저씨 이야기를 아는 사람이 몇 분이나 계실까? 이제 나는 이 한 줄 글로서 쇠줄이 아저씨를 기려본다.

 51. 놀이터 수창의원 별채

 1953년 골목대장 패를 만들고 주로 놀던 로타리 주위의 빈 터, 그리고 농협조합 뒷마당, 또 삼천포국민학교, 노산, 각산 등이 있었다. 그리고 멀리 갈 적에는 남일대까지도 갔었다.

 그리고 그곳 외에도 또 다른 놀이터가 있었는데 그곳은 수창의원 별채이다. 수창의원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헌병 관사로 사용했던 곳이다. 그래서 매물이 나왔을 당시 사람들이 선뜻 사지 못하는 건물이었는데,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삼천포 성결교회 장로님이신 강 원장님이 건물을 사서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수창의원은 세 채로 나뉘어 있는데,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 건물이 있고, 또 강 원장님의 식구들이 기거하는 안채가 있고, 또 하나는 수창의원 큰 따님 즉 사위 식구가 살고 있는 별채로 나뉘어 있었다.

 나는 원장님이 사시는 안채는 바깥에서 구경만 했지 방안으로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그리고 병원 치료실도 건물 밖은 늘 보고 지냈지만, 안에 들어가 본 적은 없다.

 그러나 별채 그 내부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사위 식구는 두 내외 분과 아들, 딸이 5명이나 있었는데, 첫째 큰딸 이름이 박양자이고 큰아들 상호는 나보다 한 살 아래인데 공부벌레라서 우리 골목대장 패에 적극적이지 못하고, 논다는 것이 나와 같이 교회 형들과 어울러 다니는 것이 고작이었다. 둘째 아들 영호는 나보다 4살 아래인데, 우리 골목대장 패가 무슨 일을 꾸밀 적에 계획까지 참가하는 적극적인 멤버였다. 그리고 그 아래 여자아이 하나와 남자아이 하나가 있었지만 너무 어려서 나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수창의원 별채의 전경은 다다미로 깐 방 4개가 한 줄로 이어져 있고, 또 따로 큰방이 하나 있었다. 집안 가운데는 마루가 있어 마루로 해서 각 방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다. 그리고 방 앞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정원이나 방 구조는 이소룡의 영화 ‘정무문’에서 일본군 장교가 기거하던 사택과 흡사하다.

 상호 아버님도 의사였는데 수창의원에서 강 원장님과 함께 환자를 치료하고 있으며 내가 다니는 삼천포 장로교회의 장로님이시다.

 우리는 상호 아버지와 어머니가 집에 없을 적에 별채로 쳐들어가서 방 다섯 곳을 운동장 삼아 술래잡기, 전쟁놀이 등으로 한바탕 신나게 뛰고 굴러다녀 집 안을 온통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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