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도(祈禱)
어떤 기도(祈禱)
  • 김루어
  • 승인 2014.02.13 20:0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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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 시인
 요즘 동계올림픽 기간이라 TV 보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소 TV를 거진 보지 않지만, 올림픽이 시작된 뒤로는 일을 팽개쳐놓고 그 앞에 앉아있기 일쑤다. 국내 각 방송 채널을 돌리다 원하는 경기가 중계되지 않으면 CNN까지 돌리게 될 만큼 올림픽에 빠져 있다 힐끔 시계를 보고는, 아, 일해야지! 하고 일어서지만 마음은 여전히 아쉽다. 오늘도 그랬다. 그런데, TV를 끄고 일어서는데 옆집 아이 선이가 아줌마! 하고 우당탕 소리를 내며 거실로 뛰어들었다.
 선이는 옆집 젊은 부부의, 하나밖에 없는 네 살배기 딸이다. 이 아이는 무시로 내 집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발단은 반년쯤 전 아이 엄마가 송구한 표정으로 외출 동안 잠시만 선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선선히 들어준 게 화근(?)이 되었다. 선이의 출입이 내 일과에 더러 방해가 되기는 하지만, 하는 짓이 밉지 않아 때로는 내 생활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오늘은, 들어오면 먼저 내게 엉겨 어리광을 부리던 평소와 달리, 거실 TV 앞에 턱하니 자리를 잡더니 리모컨을 집는다.
 그런데 아이가 바로 TV를 켜지 않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뜻밖의 행동. 선이에게 물었다. 선이야, 무엇하니? 하지만, 아이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입속으로 뭔가 중얼거리고 나서야 나를 돌아보고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아 언니가 우승하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연아 언니 경기는 아직 멀었는데? 기도는 미리 해야 되잖아요! 그리고는 시선을 돌려 TV를 켜고는 그 앞에 딱 붙어 앉은, 아기 돌부처가 되어 버렸다. 나는 뭔가 허를 찔린 기분이 되어, 한동안 아이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서재 방으로 들어왔다.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TV소리가 다소 시끄러웠지만 문은 열어 두었다, 선이에게 보호자의 시선 안에 있다는 안도감을 주기 위해. 워드를 띄웠지만 일은 잘되지 않았다. TV소리가 시끄러워서가 아니라, 내속에서 어떤 울림이 일어서였다. 선이의 기도라는 말이 내 마음의 금선을 건드린 것 같았다. 돌이켜보자니, 남을 위해서 기도해본, 아니, 나 자신이나 가족을 위해 기도해본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자괴감이 밀려왔다. 내가 이렇게 자신도 잊고 가족도 잊고 시대도 잊고 사는 속물로 늙어가는구나, 라는.
 비록 기도한 기억이 까마득하기는 하지만, 내게는 오래전에 정립된 뚜렷한 기도관이 있었다. 그 계기는 아마 청년기에 발아된, 지금은 기억도 잘나지 않지만, 그 당시로서는 심각했던 내면 문제였던 것 같다. 서른이 넘을 때까지 그 문제는 나를 방황하게 만들었는데, 이런 나를 안타깝게 여긴 지인이 나를 교회로 이끌었다. 나는 막차를 탄 각오로 기독교에 빠져 들었다. 그 난삽한 한글 신구약을 몇 번이나 읽고 납득이 되지 않으면 영ㆍ독역을 대조하고 그래도 풀리지 않으면 외경을 뒤적였다.
 그런 세월이 십년 이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풀리지 않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했다. 나는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목사님은 나를 만류하지 않았다. 아마, 여러 번의 논쟁을 통해 내가 종교적인 인간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터이다. 그 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기도였다: 자매님, 기도 하시오! 기독교는 논리이전에 믿음이고 기도라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기도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심야기도, 새벽기도, 철야기도… 정말 열심히 기도했었다. 하지만 어떤 감응도 경험하지 못했었다.
 교회를 떠난 뒤 다만 생활인으로 살았다, 문제를 풀겠다는 생각도 마음의 평화를 얻겠다는 욕구마저 버린. 취미라고는 독서가 전부였다. 나이 먹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회귀적 성향 때문인지, 주로 읽는 책이 성장기 때 할아버지에게 배운 유학(儒學)경전, 그중에서도 성리학계열 전적들이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장기 때 느꼈던 경전의 강설은 고리타분 그 자체로 각인되어 있었는데, 나이 먹어 읽으니 믿기 어려울 만큼 생생한 현실의 논리가 그 속에 있었다, 특히 심성론(心性論)이나 수양론(修養論)에.
 물론 서양철학의 입장에서 보면, 존재론과 가치론의 부당한 등치나 용어의 불명확성과 간간히 보이는 논리의 착종이 문제가 되겠지만 천년세월을 감안하면 인간과 자연, 인간과 현실에 대한 그네들의 천착은 현재 시점에 새겨보아도 법고창신의 여지가 있어 보였다. 자연히 내 독서는 성리학에 반발하여 일어난 양명학으로 확장되었는데, 나는 거기서 마음 문제를 철학적으로 다룬 심론(心論)을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왜냐하면, 내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문제가 결국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의 문제였기에.
 양명의 심론은 내게는 어둠속에 비친 한줄기 빛이었다. 그는 마음의 본래 모습을 텅 비어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은 것(虛靈不昧)으로 정의했다. 그는 전습록에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가는 길을 여러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지만 이해가 쉽지 않았는데, 어느 날 교회 새벽 종소리를 듣다 불현듯 목사님이 내게 한 기도란 말을 떠올렸다. 기도는 대상이 있어야 한다. 나는 그 자리에 마음을 놓아 보았다. 그리고 나는 마음의 생김새를 거울로 상정해보았다. 거울은 텅 비어 신령스럽고 어둡지 않아 만물을 비추기 때문에.
 마음이 허령불매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은 마음이라는 거울을 닦아 자신을 비춰 보는 일이다. 자신을 비춰본다는 것은 마음과 대화 한다는 뜻이 된다. 나는 이를 기도라고 표현한다. 왜냐하면 종교적이지 못한 나 같은 인간에게는 마음이 기도 대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양명 심론을 그렇게 이해했다. 나는 내 이해가 옳은지 그른지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 내가 내 내면 문제를 어느 정도 진화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일단 급한 불은 껐답시고 그 뒤로는 기도에 태만해오다 오늘, 네 살배기 선이의 기도에 화들짝 놀라는 내 꼬락서니라니! 이래서 때로,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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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대선 2014-02-18 20:28:06
거울에 비춰진 제 얼굴을 보면 예전과 달리
피부의 탱탱함과 줄어들고 주름도 많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사진을 찍고 싶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젊은 날의 자신의 모습과 대비되니까..^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기 싫은 것이겠지요.
기도의 대상이라.. 그 대상에게 가는 것이 마음이니..
그리 생각하면
마음 아닌 것이 없는 듯합니다.
기도도 마음이 발동한 것이니
시인님 마음에 머물다 갑니다.

이서윤 2014-02-16 14:39:42
아이는 어른의 거울이라는데 요즘은 걱정이 되는 현실속의 어른들입니다.
적당히 모범적이고 적당히 배려를 할 줄 알아야 아이들도 무의식적으로 배울텐데요

기도
저는 화살기도를 자주 하는 편입니다
때론 기복신앙일수도 있지만 특정 종교단체에 적을 두지 않은 현재로서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전에 마음을 다듬는 것이며 안쓰러운 대상에게는 그 대상을 위해서 기도를 합니다
진심을 담아, 제 에너지를 받고 힘을 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