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2:32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2.11 23: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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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68)
 때를 맞춰 순사들은 다시 박용도 아저씨 집으로 몰려 왔다. “당신이 가르쳐 준 곳에는 그 자식이 도망간 흔적이 없소. 이 집이 수상하니 실례지만 좀 찾아보겠소”하고는 신발을 신은 채로 집안으로 들어와 이방저방을 뒤지고 옷장까지 열어봤다. 방 안에서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밖으로 나가 창고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순사들은 씩씩거리며 욕을 하더니 몰려나갔다.

 그렇게 해서 쇠줄이 아저씨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고, 박용도 아저씨는 순사들이 모두 나간 것을 확인한 뒤 지하실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사건을 진상을 듣게 되었다.

 박용도 아저씨는 쇠줄이 아저씨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된다면 순사들에게 다시 잡힐 것이라고 판단했고, 또 남쪽 전쟁터로 끌려가 개죽음을 면치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쇠줄이 아저씨를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고 당분간 자기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게 했다. 쇠줄이 아저씨는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다가 한 번씩 벌리에 있는 자기 집에 볼일이 있으면 박용도 아저씨가 일을 나갈 적에 트럭 짐 속에 아저씨를 숨기고 벌리에서 내려다 주고, 또 일을 갔다가 돌아올 적에 벌리에서 쇠줄이 아저씨를 태우고 자기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아무튼 이것저것 여러 가지로 박용도 아저씨는 쇠줄이 아저씨에게 편의를 제공했고 보살펴 주었다. 그러길 일년이 넘자 나라는 해방됐고 지루한 쇠줄이 아저씨의 도피 생활도 끝이 나게 됐다.

 49. 난처했던 아저씨

 쇠줄이 아저씨는 해방이 되자 이제 징병이라는 공포는 사라지고 자유의 몸이 됐지만 좋은 직장을 얻지 못해 어렵게 사시게 된다.

 일제강점기 때는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연락선 하역 회사에 다녔지만, 해방이 되자 일본 사람들이 철수하면서 회사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틈이 나는 데로 박용도 아저씨 회사에서 궂은일을 봐주고 몇 푼 얻어 생활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이 쇠줄이 아저씨를 종종 볼 수 있었고 또 한 번씩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어느 날 내가 박용도 아저씨 집 앞으로 지나는데 집안 마당에서 어른들의 날카로운 말소리가 들렸다. 조금 열린 대문을 통해 안을 보았더니, 마당에 쇠줄이 아저씨와 박용도 아저씨가 마주 보고 서 있었고 박용도 아저씨가 “왜 인주 새끼를 봐주는 거야”라고 하면서 쇠줄이 아저씨의 발을 차대고 있었다. 인주는 우리 삼촌 이름이다. 인주 삼촌은 6ㆍ25전쟁 때 소영웅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 표창도 받은 분이다. 전쟁 때 총을 맞고 준위계급으로 제대해 삼천포 상이군인회에서 회장을 맡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박용도 아저씨와 아주 큰 싸움을 했다. 박용도 아저씨가 화가 난 것은 자기가 인주 삼촌 형의 친구인데 친구의 동생인 인주가 덤비는 것이 괘씸했기 때문이다. ‘인주 형’이란 바로 우리 아버지를 말하는 것이다. 당시는 전국에서 상이군인회가 최고로 끗발이 있던 시절이었다. 회장이었던 우리 인주 삼촌은 세를 과시하기 위해 자기보다 더 강한 박용도 아저씨에게 덤벼 큰 싸움을 벌어진 것이다. 화가 난 박용도 아저씨는 집에 있던 권총을 들고 나와 설쳤는데 우리 엄마가 뜯어말려 겨우 싸움이 끝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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