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년쯤 우리집이 작은 집으로 이사하기 전의 이야기다. 그때 동네에는 트럭을 가지고 운수업을 하시는 박용도라는 아저씨가 계셨다. 그 당시는 삼천포에서 부자라면 논을 많이 가졌다든지, 병원을 가진 병원장이던지, 아니면 버스나 트럭을 가지고 운수업을 하시는 분을 꼽았다. 그러니 그분도 꽤 재력가에 우리 아버지의 친구셨다. 힘도 세서 남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분이었다.
박용도 아저씨에게는 우리집 앞에 트럭이 들어갈 수 있는 차고가 있고, 집 뒤에는 가정집이 있었다. 이 박용도 아저씨 집에는 한 번씩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쇠줄이 아저씨가 다녀가시고는 했다. 나는 이분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동네 어른들이 “쇠줄이, 쇠줄이”하며 부르길래 나도 그냥 쇠줄이 아저씨라 부르는 것이다. 쇠줄이 아저씨는 박용도 아저씨 집에서 궂은일을 하거나 심부름을 하셨다.
아저씨는 길에서 마주치면 나를 향해 싱긋 웃고는 하셨다. 아마 우리 아버지나 인주 삼촌과 친하게 지내시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친구들과 공놀이를 하던 중 공이 지붕 위로 날아갔다. 마침 쇠줄이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공을 내려 주셨다. 또 어떤 때는 초등학교 5~6학년 형들이 우리를 놀리며 이유 없이 때리려고 하는데 마침 쇠줄이 아저씨가 지나가다가 이 광경을 보고는 못된 형들을 향해 “이놈들 왜 동생들을 못살게 굴어”하면서 고함을 치자, 그 형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을 가버렸다. 그때의 쇠줄이 아저씨는 꼭 수호천사 같았다.
아저씨는 마음씨가 순하고 바다같이 넓은 깊은 분이었다. 그의 부인도 한 번씩 우리 동네에 오셨는데 쇠줄이 아저씨의 덩치에 비해 너무나 작고 왜소하셨다. 전혀 어울리지 않지만 잘 사시는 걸 보면 신기했다.
그 당시 한내 다리를 건너면 비워져 있는 긴 철길이 있었다. 이 철길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물자를 대륙으로 수송하기 위해 만들던 중 해방이 되면서 사업이 중단되고 빈 철둑과 역사(驛舍)만 남겨져 있는 상태였다.
어느 날 외갓집을 가기 위해 철길 옆 빈 역사 앞을 지나가던 중이었다. 철길 옆에 덩그러니 서 있는 두 평 정도의 초라한 오두막집이 있었는데 쇠줄이 아저씨의 부인이 그곳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제야 그 집이 쇠줄이 아저씨 집인 줄 알았고, 너무 애처로워 보였다.
47. 별명의 근원
이 아저씨에게 동네 사람들이 쇠줄이란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 때의 일이다. 해방되기 1년 반쯤 전의 일인데 그때 아저씨는 부둣가에서 연락선에 관련된 회사에 작업 관리를 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인 반장이 조선인 인부가 너무 게을리 일한다며 마구잡이로 때리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그 일본군 반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다가 주먹을 날려 버렸다. 반장은 바닥에 나뒹굴었고 이를 보고 있던 일본인들이 아저씨를 고발했다.
아저씨는 경찰서에 잡혀갔고, 일본 순사들은 아저씨 뺨을 이리저리 치다가 나중에는 아저씨를 눕혀놓고 큰 몽둥이로 엉덩이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때렸다. 아저씨는 너무 아팠지만, 조선인을 때린 하역 반장을 때린 댓가라고 생각하니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