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매(寒中梅)
한중매(寒中梅)
  • 김루어
  • 승인 2014.02.06 20:1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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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 시인
 산새들이 먹이를 찾아 마을까지 내려올 정도의 혹한이던 작년 겨울에 비해, 이번 겨울은, 상대적으로 날씨가 다소곳하다했더니 입춘(立春)을 전후하여, 자신도 겨울이라는 것을 시위라도 하듯 이가 시릴 정도의 한파로 그 본색을 제대로 드러냈다. 소위 말하는 입춘추위다. 매일 아침 공원에 운동을 나가는 가까운 친구가, 날씨가 추우니 가지 말라는 가족들 만류에, 괜찮아, 입춘이면 봄이야! 라며 평소처럼 공원에서 운동을 하다가 열흘 이상 깁스를 해야 하는 낙상(落傷)을 당했다. 입춘이라는 절후를 믿은 불상사였다.
 그 소식을 듣고도 나는 오후에 산책을 갔다, 날씨가 춥다고 빠지면 신체리듬이 깨어질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일이 일찍 끝나 밝을 때 나갈 수 있었다. 산길 산책로는 후드 마스크 패딩코트로 중무장을 했음에도 겨울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채찍처럼 매서웠다. 날이 밝은데도 사람이라고는 없었다. 은근히 후회가 되었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갑자기 추워진 탓인지 중무장을 했음에도, 얼마가지 않아 고질인 무릎이 저려왔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평소 쉬는 대숲 못미처에 있는, 상수리나무가 작은 군락을 이룬 비알에 기대어 무릎을 주물렀다.
 십 분쯤 무릎을 주물러도 별 효과가 없어 돌아가는 것이 현명할 것 같아 일어서는데, 문득, 건너편 잡목들 너머로 내 키 배쯤 되는 크기의 나무에 달린, 발갛게 빛나는 열매 같은 것이 눈길을 끌었다. 이 년째 이 산길로 다니지만 겨울에는 본적이 없는 정경(情景)같았다. 처음에는 낙상홍(落霜紅)인가 싶었지만 나무 크기나 계절상으로 보아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거리가 멀어, 아니면 노안이어서인지, 정확히 판별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호기심에 무릎이 아픈 것도 잊고 조심조심 덤불숲을 헤치고 그 나무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꽃이었다. 홍매화(紅梅花), 올망졸망 송이를 이룬 사랑스러운 홍매화였다! 이 추운 날씨에 이렇게 꽃을 피우다니! 몇 년 만에 보는 한중매(寒中梅)였고, 올 들어 처음 보는 자연화(自然花)이기도 했다. 한중매를 처음 보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나는 일종의 감동에 가까운 감정으로 매화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산에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에 오지 않았다면, 저 사랑스러운 꽃을 보지 못했을 것이므로. 어쩌면, 홍매가 나를 불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차가운 바람에 꽃은 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미소 짓듯 하늘거리고 있었다. 나도 꽃에게 미소를 보냈다. 문득, 요즘 다시 읽고 있는 전습록(傳習錄)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그대가 아직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에는, 이 꽃과 그대 마음은 함께 쓸쓸했었느니라(你未看此花時, 此花與汝心同歸於寂). 내 마음이 봄을 기다리고 있어서였을까? 한 떨기 매화나무가 너무나 귀하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그 감정이 지나쳤나보았다. 나도 모르게 가지 하나를 꺾고 만 것이다. 툭, 하고 가지 꺾이는 소리가 꽃이 우는 소리로 들렸다.
 나는 나무에게서 도망쳤다, 죄인처럼. 아니 나는 죄인이었다, 나무에게… 집으로 돌아오며 전습록 구절을 되씹어 보았다. 꽃과 만나는 인간, 인간과 만나는 꽃. 양쪽 다 서로에게 벗이 되어 쓸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꽃은 누군가에게 보여 지기 위해 피는 것일까? 나처럼 공격적인 인간이면, 차라리 만나지 않음만 못하지 않을까? 물론, 이런 질문은 전습록 구절의 본래의 의도와는 다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물음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꽃은 누군가에게 보여 지기 위해 피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뇌리를 뒤적여 찾아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답변은 정언명제(定言命題)화 되다 시피한 독일시인 앙겔루스 실레지우스(Angelus Silesius)의 싯귀다: 장미는 왜라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Die Rose ist ohne Warum). 여기서, 장미는 모든 꽃을 제유(提喩)하고, 존재한다는 말은 피어 있다는 뜻임은 물론이다. 오지리(墺地利) 철학자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도 비슷한 요지의 말을 하고 있다: 신비한 것은 세상이 어떻게 있는 것이 아니라, 어찌되었던 세상이 있다는 것이다(Nicht wie die Welt ist, ist das Mystische, sondern dass sie ist).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솔직하고 더 겸손한, 세상과 생명에 대한 접근법을 알지 못한다. 세상과 생명은 논리나 분석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세상은 우리가 대상화 시킬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생명 또한 스스로 존재한다. 생명은 무한히 끓어오르는, 삶에 대한 원초적 욕망이다. 환경(環境)이나 조건(條件), 강약(强弱)이나 노유(老幼)가 그 욕망을 한계 짓지는 못한다. 나는 한중매(寒中梅)에서 그것을 본다. 이는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멀리 보면 비록 삶이 순간일지라도, 순간에 영겁의 아름다움을 담아 꽃처럼 피어나고자 하는 게 우리 인생일터이기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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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관 2014-02-10 21:04:59
시인님의 눈에 띤 꽃은 행복했을 겝니다
시인님도 잠시 그 꽃 때문에 즐거웠을듯~ㅎ
꽃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피고,그런 꽃을 보면 즐겁지요
그래서 나도 누군가에게 꽃이고 싶습다고들 하나 봅니다

효원 2014-02-10 16:30:09
안타깝게도 저는 자연산 매화를 보지 못했습니다.
기껏해야 수목원 유리 하우스안에서 보던 매화를 본게 다인 저로서는
글 속에 잠시 헤매다가 마치 제가 한 가지를 꺽은 듯 미안함에 뒷걸음칩니다

그렇네요. 정말
삶은 매화처럼 피우자 하는 본능인 것을,
입춘의 혹한에도 물러서지 않는 그 당당한 아름다움처럼.

강대선 2014-02-07 10:46:47
산에 가야 홍매화를 보듯..
수고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생명과 만나는 일도
인간과 만나는 일도
세상과 만나는 일도
결국은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겨울, 추운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날입니다..
저도 가까운 산에 올라
홍매화는 아닐지라도 봄 소식을 듣고 싶어집니다.
맑고 고운 생명과의 만남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