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4:09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1.28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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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60)
 40. 허공의 환호성

 만삭의 몸으로 보건병원 앞에 버려진 여승은 지그시 눈을 감고 열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이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고 허공에 활짝 웃으며 두 손을 흔들어 대던 여승.

 (나는 이 여승의 이름도 모른다. 그리고 어디 살았는지 어떻게 이곳에 와있는지도 몰랐다. 글을 쓰면서 영미라고 한 것은 독자들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 내가 가명으로 만든 이름이다. 그리고 여승을 리어카에 싣고 온 사람이 구경꾼들에게 이 여승의 이야기를 해줬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내용을 내가 듣게 됐고 이 여인의 과거를 글로 적을 수 있었다.)

 그때 여승은 가장 행복했던 졸업연주회 때로 돌아간 듯이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허공에 피아노를 쳤고 연주가 끝나면 관중의 환호에 손을 들어 답했다. 보건병원 앞마당. 다른 사람 눈에는 극장, 피아노와 관중도 보이지 않지만 영미에게는 모두 보이고 들린다.

 나는 이 모습을 원만큼 보다가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음 날 병원을 다시 찾아 갔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원장 선생님이 여승을 보건병원 안으로 데려와 아이를 낳게한 것이다. 한 번씩 이상한 짓을 하시던 원장 선생님은 그날 정말 좋은 결단을 내리신 것 같다.

 그 후 50년이 지난 지금, 세월이 흘러 여승은 죽었겠지만, 그때 낳은 아이는 50살이 넘은 중년 일텐데 아직 살아 있을까… 살아있다면 자기 엄마가 누구인지, 또 자기를 어떻게 낳았는지, 그리고 엄마의 억울한 사연은 알고 있을지 하는 것들이 궁금하다.

 41. 진짜보다 값진 가짜 만화책

 1953년에 우리집에서 만화 대여점을 그만두자, 삼천포 시내에서는 2~3년 동안 만화 대여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동네 아이들이 다 본 잡지나 동화책 그리고 만화책은 꼭 나에게 가지고 오기 때문에 시내 서점에서 있는 책들은 모두 다 읽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본 책들은 학원 잡지, 새벗, 그리고 자유의 벗들이고 또 어른용으로 아리랑 잡지 등이다.

 자유의 벗 잡지는 보통 책보다 훨씬 큰 책이었다. 유엔군 사령부에서 홍보용으로 무료 배포하는 책인데, 김용환 선생님이 멋있는 그림과 코주부라는 어른을 주제로 컷 만화를 그렸는데 꽤 재미있었다. 그리고 소련의 수상 스탈린의 내용으로 하는 삽화가 많이 실려지고 김일성을 표독스럽게 그린 만화도 실리곤 했다.

 그리고 새벗 잡지는 기독교 계열 회사에서 발행하는 책이라 크리스천 집안인 수창의원에서 정기 구독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수창의원 큰아들 상호가 나에게 새벗 잡지를 빌려 주면서 모레까지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리고 이틀 후에 우리는 놀기 위해 모였는데, 나는 약속을 잊어 빈손으로 나가게 됐다. 상호는 나를 보더니 “부진아. 책 가져왔나”하고 묻자 나는 “아 참! 깜박하고 안 가져왔어”라고 하자 상호는 책을 챙기는게 귀찮은지 “그럼 그책 너 가져라”하는 게 아닌가.

 요즈음이야 친구들에게 책 한 권 선물하는 건 별것 아니지만 그 시절에는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선물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책을 선물 받아 좋기는 고사하고 상호에게 한 방 맞은 것처럼 미안한 마음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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