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39 (금)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인생만화경(人生漫畵鏡)
  • 최경탄
  • 승인 2014.01.19 23: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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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삼천포 시절(53)
 둘은 도로 밖 농로에 들어가 서고, 다른 학생들은 좋은 구경거리가 생겼다며 따라와서는 주위를 둘러쌌다. 그 가운데서 우리는 서로 노려보다가 내가 먼저 좌우 주먹 두 방을 다른 반 학생 면상을 연달아 갈겼다.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려는 찰라 저쪽에서 “이 녀석들 그치지 못해”하고 투박한 어른 목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구경하는 학생들은 “선생님 오신다!”하고는 뿔뿔이 흩어졌다. 이내 건장한 선생님이 들이닥쳐 얼굴을 보는데 영어 선생님이셨다. 나는 그만 얼굴이 파랗게 질리고 말았다. 왜 하필이면 내가 찍힌 그 영어 선생님에게 싸움하다 들켰을까. 다른 학생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나랑 싸우던 친구와 영어 선생님만 남았다.

 영어 선생님은 “너희 둘 내일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와”라고 하시더니 먼저 자리를 피하신다. 싸움하던 두 친구는 머쓱하게 서 있다가 각자 집으로 갔다.

 나는 집에 가서도 걱정이 태산이었다. 왜 하필 그 순간에 그 영어 선생이 지나가셨을까. 그렇지 않아도 그 선생님은 자기 결혼사진 망친 것 때문에 나를 벼르고 있을 텐데. 이제 나는 제대로 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정말 하늘이 노래졌다.

 다음 날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교무실에 가기 위해 옆반에 그 친구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친구는 그날 학교에 오지를 않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겁을 먹은 것이다. 나는 혼자 영어 선생님에게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생각을 했다. 그냥 가지 않고 있으면 선생님이 다른 학생을 시켜 나를 부르겠지? 만약 불려 가면 선생님이 나에게 엄하게 “왜 교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안왔어”하고 추궁을 하면 나는 “같이 싸우던 학생이 학교에 안나와서 혼자 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 그 학생이 학교에 오면 같이 가려고 안갔습니다”하고 말하면 될 것 같았다. 그런 좋은 생각이 나서 배짱 좋게 선생님이 부르시면 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내내 긴장하고 있었지만 다행인지 부르지 않으셨다.

 그 다음 날도 내 마음은 무거웠다. 어제 맞았어야 할 벼락을 오늘 맞을 거라 생각하니 숨이 막혀 온다. 오늘은 옆반 친구를 찾아가지도 않고 처음부터 배짱 좋게 선생님이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학생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그 다음 날도 선생님은 나를 부르지 않았다. 그 다음 날도….

 아니 졸업 때까지 선생님은 영영 나를 부르지 않았다. 무슨 이유였을까? 선생님이 건망증이 있어 우리를 불러 놓고 그 사실을 잊어버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처남 태호 무리의 대장이라 태호 때문에 봐준 건가? 아니면 동네에서 호인이신 아버지를 보고 그러는가? 삼촌네들 보고 봐주는 건가…? 나는 이유를 생각해 봤지만 모두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자기 결혼사진 망쳐 놓은 개구쟁이 아이. 모자챙을 눌러 쓰고 인사도 하지 않는 학생. 길가에서 친구와 싸우다 걸린 학생. 교무실로 오라고 했는데도 배짱 좋게 오지도 않은 학생.

 한 번쯤은 야단을 칠만한데 그냥 넘어간 이유는 내가 어른이 돼서야 그 정답을 알 것만 같다. 동네 개구쟁이 녀석을 그냥 예쁘게 봐주신 것이다. 이제 팔순이 넘으셨을 선생님. 오래도록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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