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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탐험가 도용복 ‘땅끝을 가다’ - 요르단
오지탐험가 도용복 ‘땅끝을 가다’ - 요르단
  • 도용복
  • 승인 2014.01.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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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들어낸 보물 ‘페트라’
▲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요르단의 페트라.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자연이 만들어 낸 기암 협곡이 탄성을 자아내게 만든다.
신이 빚어낸 유적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

 중국의 진시황이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쌓은 만리장성, 해발 2천430m 고원에 우뚝 솟은 ‘사라진 문명’ 잉카의 수도 ‘마추픽추’, 또 다른 ‘잃어버린 문명’ 마야의 중심지 멕시코 ‘치첸이트샤’, 글래디에이터들의 삶과 죽음이 피로써 배어난 로마의 ‘콜로세움’, 무굴왕조의 샤자한 황제가 황비 마할의 죽음을 슬퍼해 만든 인도의 신비 ‘타지마할’, 38m의 높이만큼 피지배의 한이 묻어나는 브라질 항쟁의 상징 ‘예수상’ 그리고 자연이 만든 아라비아의 상징, 요르단 ‘페트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지난 2007년 세계7대 불가사의재단이 새롭게 발표한 세계 7대 미스터리들이다. 역사를 거슬러 고대와 중세를 이어오며 인류의 작품이라기엔 상상하기 어려운 문명사의 걸작들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나는 신이 빚어낸 유적지인 페트라를 최고로 꼽고 싶다. 물론 페루의 우루밤바 강을 휘감은 계곡 위로, 스페인 정복자들의 눈을 피해 하늘을 뚫을 만큼 높은 산꼭대기에서 최후까지 저항의 기치를 내세운 마추픽추도 장관이지만 이곳만큼 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지진 못했다고 생각한다.

 요르단은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랍계와 이스라엘 사이에 낀 작은 국가다. 요르단은 분명 아랍의 일원이긴 하지만 이스라엘과 국교를 수립하고 국경도 열어 ‘국제적인 화약고’에서 유일하게 이슬람과 유태교가 소통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다. 전형적인 농업국가지만 사람이 살기 힘든 사막 등 척박한 땅이 국토의 4분의 3에 이를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지녔다. 아라비아의 보물인 석유라도 묻혔으면 다행이겠는데 그런 축복마저 허락받지 못했다. 게다가 먹을 물까지 부족해 이웃 시리아로부터 얻어 쓰는 형편이다. 석유도 없고 물도 없고 사방은 사막으로 가로막힌, 어찌 보면 ‘자연이 외면한(?)’ 이 땅의 국민들에게 그러나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랑거리가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땅 밑에 깔린, 세상의 자동차들의 100년의 연료가 될 만큼 많은 석유를 준다고 해도 결코 바꾸지 않을 보물, 그것이 바로 페트라다.

 요르단 아라비아사막의 끝자락. 사막을 얼마간 가로질러 언덕 굽이로 내려가다 산허리를 돌자 멀리 노을에 물든 거대한 바위산이 신기루처럼 눈앞을 가로막았다. 원래 붉은색 사암이 노을빛에 반사되어 황토색 뭉게구름이 하늘에 걸친 듯 했다. 안내인에 따르면 그 옛날 바다 속 대륙붕이 지각변동으로 땅 위로 솟구친 것이라 했다.

 바위산은 올라가는 입구부터 ‘신의 조화’다운 장엄함이라 할 만큼 자연 그대로의 비경이 펼쳐진다. 수만 년에 걸쳐 바다 밑을 흐르던 해류가 바위산에 조그만 구멍을 뚫었고 마침내 산 전체를 관통하는 기나긴 협곡을 만들어냈다. 최초엔 몇 mm에 불과하던 틈새가 해수의 흐름으로 차츰 넓어지다가, 또 그 세월의 흐름 위로 켜켜이 쌓인 공덕이 어느 날 융기라는 거대한 땅의 변화와 어울려 사막 위로 치솟은 것이었다. 원래 물살이 드나들던 폭 4~5m의 그다지 넓지 않은 곳이었다. 반면 높이는 100여 미터에 이를 만큼 높았다. 양쪽으로 암벽이 2km나 이어진 천연 그대로의 바위 터널이었다.

▲ 터널을 나서는 순간 마주하는 ‘알 카즈네’. 페트라 하면 알 카즈네라고 할 정도로 유명한 유적이다.
 기원전 7세기경, 이곳에 정착한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 왕국을 세우고 이 협곡터널을 지나는 대상들로부터 통행료를 받아 갖은 영화를 누리며 인공의 유적들을 가미했다. 세월이 흘러 그 많은 조각들이 부서지고 유적들 또한 이제는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됐지만 당시의 융성함을 짐작하기엔 충분했다. 터널을 나서는 순간 마주하는 ‘알 카즈네’는 높이 45m의 바위산 전체를 하나로 조각한 페트라 최고의 유적이다. 전면에 높이 35m의 돌기둥이 6개 서 있는데 각각 그리스 신을 상징하는 식물과 여인의 조각이 좌우에 새겨져 있다. 또한, 제일 윗부분에 놓인 항아리 형태의 조각은, 나바테아인들이 그곳에 보물을 숨겼다고 해 ‘알 카즈네(보물창고)’라고 이름 붙였다.

 그동안 페트라는 6세기에 있었던 지진에 의해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서기 106년 로마에 점령되면서 요르단에도 돌을 쌓아서 건물을 짓는 양식이 도입됐으며, 그 후 천연 바위를 이용한 건축 양식은 사장된 것으로 보이다가 1812년 스위스의 젊은 탐험가에 의해 발굴되면서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발굴 이전까지 페트라는 소수의 베두인족들만이 아는 그들만의 보물창고로 남아 있었다.

 페트라는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뜻이다. 나바테아인들은 절벽의 바위산을 통째로 깨서 사원을 만들고, 왕의 무덤과 집을 만들었다. 건물들도 대부분 암벽을 파서 만들었으며 극장과 목욕탕, 상수도가 갖춰진 현대 못지않은 도시구조를 이룩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사암으로 만들어진 이 도시는 앞서 설명한 거대한 바위산 협곡터널과 이를 활용해 만든 왕가의 무덤, 유적 등이 연출해내는 장관이 그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압도한다. 특히 해 질 녘의 페트라는 보는 방향과 햇빛의 각도에 따라 붉은색과 노란색이 환상적으로 섞이며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결코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만약 있다면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것 같은, 천상의 컬러를 엮어낸다. 감탄사가 절로 나지만 그 장관에 대해 딱 잘라 말하기엔 나의 글재주가 부족함을 통감한다. 페트라를 제대로 체험하기엔 하루로 모자라지만 노을에 물들어가는 도시 전체를 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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