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침묵
말과 침묵
  • 김루어
  • 승인 2014.01.16 19:27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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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과 함께 전철이나 버스를 타게 되어, 그들이 재잘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를 무심코 듣다보면, 슬그머니 웃음이 날 때가 있다. 기성세대 눈에는 별 대단치도 않은 일들이 그들에게는 화젯거리가 되어 오가기 때문이다. 하긴 어쩌면, 성장기에 수다스러워지는 것은 일응(一應) 당연한 일 일수 있다. 알을 깨고 세상에 갓 나온 병아리들처럼, 그들에게 처음 주어진 도구인 말로 세상을 읽고 말로 세상에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돌이켜보면 기성세대들 또한 그랬을 터이다. 나 또한 열외는 아니어서, 어릴때부터 내게는 (글을 포함한) 말은 도구를 너머 일종의 환상이기까지 했다. 할아버지 탓이다. 유년기에 나는 사랑방에서,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공직자이어서 어머니마저 아버지 임지에 가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을 하고 제법 걸어 다닐 무렵부터는 할아버지가 나와 잘 놀아주지 않았다. 손녀와 놀아주기 보다는 책속에 묻혀있었다.
 사랑방에는 곰팡내 나는 한적(漢籍)이 산처럼 쌓여있었고 돋보기를 쓴 할아버지는 언제나 그 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런 할아버지 모습은 엄숙하고 외경스럽기까지 했다. 왼 종일 책만 읽는 날도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책속에 뭐가 있어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돋보기를 벗으며 말했다: 세상이 있단다. 물론 친구도 있지. 당연히 나는 그런 할아버지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 다음 말이 이어졌다: 너도 책을 읽어 보련?
 그러면,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달아났다. 하지만 집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동무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 또래들과 놀면, 몸이 약해 반드시라고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다치거나 며칠씩 앓아눕게 되어 또래들이 동무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집 안채 바깥채, 마당과 뒤란을 혼자 돌아다니다 지치면 다시 사랑방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책속에 몰입해있는 할아버지가 있는. 그리고는 손녀의 특권으로 막무가내로 할아버지에게 칭얼거렸다. 심심하다고!
 그러면 할아버지는 대책없다는 표정을 짓다가는 나를 달래 서안(書案)앞에 앉히고 글을 읽혔다, 그것도 재미없는 한문을. 마지못한 듯 할아버지 명을 따랐지만, 책에 아주 끌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뜻도 모르지만, 가끔씩 할아버지가 유장하게 읽어내려 가던 시전(詩傳)의 리듬이나 읽으면서 눈물까지 흘리던 두시(杜詩)의 운율이 문득 문득 내 가슴을 움켜쥐었던 탓이었다. 돌이켜보면, 언어에 대한 내 환상은 그때부터 시작된듯하다.
 여고에 들어간 해 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전에 할아버지는 내게 숙제를 남겼다. 그 봄에 나는 주역 계사전(繫辭傳)을 읽고 있었는데 한 구절에 막혀있었다.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한다(書不盡言 言不盡意). 언어의 전능성(全能性)에 환상을 품고 있던 내게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내 질문에 할아버지 답변은 정언적(定言的)이었다. 용(用)으로는 체(體)를 그려낼 수가 없단다. 체(體)는 언어너머 있는 것이기 때문이지.
 하지만 나는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언어너머는 침묵이 있을 뿐인데, 그 답변은 결국 침묵을, 언어로는 불가하니, 언어 아닌 방법으로 침묵을 읽어내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벽 앞에 선 기분이었다. 이 숙제는 나로 하여금 언어에 더 집착하게 하는 계기가 되어 청년기 한때를 언어철학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특히,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을 좌장(座長)으로 하는 분석철학자들 저작들에ㅡ그중에서도 <논리철학논고>에.
 언어는 세계에 대한 그림, 사실의 총체인 세계에 대한 그림이어서, 언어의 구조는 세계의 구조와 같다는 그림이론이나; 언어는 세계를 반영하는 최소단위인 요소 문장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므로 복합문장의 진리값은 원자문장의 진리값의 함수이다, 와 같은 외연성이론은 나를 황홀경으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명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는 침묵해야 한다, 는 체(體)를 언어로 그려낼 수 있는가? 라는 내 질문에 찬물을 끼얹었다.
 그의 마지막 명제는, 당신시대에 외면당한 성리학의 명제들에 평생을 천착(穿鑿)한 할아버지의 말이나, 불립문자를 종지로 하는 선불교의 공안들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이론의 방법론과 전개는 참신하고 독창적이었지만, 체(體)문제에 대한 답변이 되는 결론은 기성고등종교나 동양사상들의 주장과 변별이 되지 않을 만큼 진부했던 것이다. 당연히 후기저작에는 흥미를 잃었다. 선대철학자들 주장들과 일정부분 타협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나는 언어를 밥벌이의 한 수단으로 하여 한 세월을 살아왔다. 이는 아직도 내가 언어에 대한 일말의 환상을 가지고 있다는 뜻일 터이다. 그런데, 세월이 갈수록 언어가 두려워진다. 세상에 너무 많은 말들이 난무하기 때문이다: 신문, 라디오, 티비, 인터넷, 영화, 광고지들에… 이것들에 난무하는 말들 속에 얼마만큼의 진실이 들어 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볼 때, 진부하다고 속단했던 그이들 말씀이 정곡(正鵠)을 찔렀다는 생각이 든다.
 본질[體]은 말속에 있지 않다. 말로 표현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침묵은 인간을 정화(淨化)시키고 언어를 정화(精華)시키는 미덕이 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고 인간이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개별자로서의 인간은 섬이기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바다에 뜬 외로운 섬. 언어는 배다, 그 외로운 섬과 섬을 이어주는 배. 누구나 배를 띄울 때 일기를 본다, 노호하는 바다인지 침묵하는 바다인지 알려고. 노호하는 바다를 읽기는 쉽다. 그러나 침묵하는 바다는 읽기 어렵다. 우리는 침묵하는 바다는 어떻게 읽어야 할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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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 2014-01-22 11:58:30

누구나 할 줄 아는 말, 경험이 많아지고 나이가 들면 더 많아지는 말수
때와 장소에 맞게 적절히 조절하면서 제대로 된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차라리 침묵이 그 사람을 더 돋보이게 하지요
언어의 효용론에 대한 생각이 필요할 시기입니다. 현대사회는!

임종관 2014-01-20 22:01:19
선생님의 수필은 숯 같아요
시인의 가슴을 타워 남긴 숯...
그래서 읽고 나면 마음이 훈훈해 집니다

강대선 2014-01-17 00:45:15
그래서 뭔가 단절된 듯한 느낌을 받았을까요...
그들이 정신을 올곧게 받아들이지 못한 삐딱함들..
하지만 옳은 것들이 있지요..
우리의 뼈와 살로 녹아 흐르는 것들..
그것들을 다시 살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인님의 글 속에서 잊혀져 가는 우리의 체를 다시 생각합니다.
시간을 흐르고...
우리도 하나의 체가 되어 후손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까요.
겨울밤이 무섭도록 적막합니다...

강대선 2014-01-17 00:41:00
시인님의 글을 읽고
할아버지 세대의 전통이 우리 후손들에게도 전승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에 봉착된 아버지의 세대에 이런 문제들이 얼마나 현실적으로 다가왔을까 하는 생각까지..
조금만 더 현실적인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면 우리 나라가 이랬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제 다시 그들의 정신을 돌아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