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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眞伊(황진이)
黃眞伊(황진이)
  • 송종복
  • 승인 2014.01.15 22: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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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종복 문학박사(사학전공)/(사)경남향토사 수석부회장
黃:황 - 누를, 眞:진 - 참, 伊:이 - 저

뛰어난 미모와 학예로 뭇 남성들의 사랑을 한 몸에 지니며 살아온 여인. 우리나라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제 1의 여인상을 지칭.

 본명은 황진(黃眞, 1511-1551)이며 기생이름은 명월(明月)이다. 황진이를 언급한 책은 허균의 <성옹식소록>,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김천택의 <청구영언>, 유몽인의 <어우야담> 등에 있는데, 정사인 <중종실록>에는 기록이 없어 의구심이 많다. 특히 1604년에 죽천 이덕형(竹泉 李德泂)이 암행어사로 송도에서 황진이의 명성을 들어보고는 <송도기이(松都記異)>에 ‘선녀’이며 ‘천재’라고 칭송하였다. 그녀의 주요 작품으로는 <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박연폭포(朴淵瀑布)>,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 외 시 및 시조 13수가 전한다.

 황진이, 그녀! 시조와 가무에 능숙한 절세미인으로 우리나라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역사속의 여인 중 항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송도[개성]의 양반 황진사의 첩의 자식으로 태어나 우여곡절 끝에 기생이 되었다. 황진이를 거처 간 남정네들을 살펴보면, 옆집 총각이 짝사랑하다 상사병에 걸러 죽었다.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을 지나가다 땅에 붙어, 황진이가 속옷을 벗어 상여에 덮어주니 움직였다고 한다. 이같이 또 죽어가는 총각 때문에 기생(妓生)이 되었다. 그 후 개성유수 송공(宋公)은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하였는데, 그때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하여 황진이가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대제학 양곡 소세양(蘇世讓)이다. 그는 ‘남자가 여색에 유혹되면 남자가 아니다.’라 하니, 이 말을 들은 황진이가 송별 ‘소양곡’을 부르니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 후는 왕족 벽계수다. 그는 황진이가 따라와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갔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하니, 그 소리를 듣고 말에서 떨어져 ‘낙마곡’ 으로 유명하다. 다음은 면벽(面壁)의 지족선사다. 황진이의 미모와 유혹에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었다. 그 외 성리학의 대가 서경덕도 황진이 앞에서는 ‘예스 오케이’였다. 이와 같이 고관대작, 스님, 학자 등 거의 황진이의 치마폭에 놀아났다고 하니, 그의 교언영색(巧言令色)은 감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래서 후일의 남자들은 그녀를 그리워하며 백호 임재는 평안감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자는가 누웠는가?’ 하며 술잔을 권하였다는 이유로 파직 당하였다.

 이와 같이 황진이는 남성위주의 유교사회를 휘저었고, ‘섹스’는 언제나 본인이 선택하고 선도했으나 헤프지 않았으며, 시화(詩畵)와 가무(歌舞)에 능하고 풍류(風流)를 알았다. 서양 및 중국의 미녀는 단순히 미모로 권력자에게 몸을 맡기고, 이름을 날린 것과는 차원이 다른 조선고유의 절세미인이다. 요즘은 어떤가. 황금만능시대에 도덕도 윤리도 없고, 학문과 교양도 없이, 마구 성형미모 하나로 설치는 여성들에게 옛 황진이의 생활양상을 찾아보라는 의미에서 언급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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