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8:00 (목)
겨울 산책로에서
겨울 산책로에서
  • 김루어
  • 승인 2014.01.09 20:18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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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 시인
 한겨울이지만 지난 며칠 동안 초봄을 연상시키리만큼 포근하던 날씨가 어제 오늘 들어 갑자기 추워져 겨울의 본색을 드러냈다. 일부지방에서는 눈까지 내린다고 한다. 하지만 내 산책 시정(時程)이 날씨 따위에 영향을 받을 수는 없다. 몸이 약해 잔병이 많은 내가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는 최소한의 운동이기 때문이다. 내 일과는 대개 여섯시 전후로 끝난다. 그 시간이 되면 나는 책상 앞에서 일어나 패딩코트를 걸치고 밖으로 나간다.
 밖은 이미 어둡다. 겨울 저녁 여섯시면 벌써 밤이다. 그러나 도리가 없다, 시간이 이렇게밖에 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처럼 산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집주위에 녹지가 있다는 것은 도시인으로서는 행운에 가깝다, 더군다나 그 녹지가 ‘녹’의 진원(震源)인 산(山)일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높고 낮은 고만 고만한 크기의 주택가 골목을 한동안 걷는다. 주택들 창에서 나오는 불빛들이 다숩다, 아마, 추워진 날씨로 스산할 만큼 거리에 인적이 드문 탓이리라.
 주택가 끝자락에 있는 작은 공원을 지나 길을 건너면 산으로 가는 입구다. 산길로 들어서자 인적은 끊어졌다. 다만 어둠속에 구불구불하게 이어질뿐인, 양옆으로 나무들만 도열(堵列)해 있는 산길. 하지만, 나는 이 길을 사랑한다. 처음에는 이 길이 무서웠다. 여름에는 제법 산책인들이 있었지만, 봄이나 가을, 특히 겨울 이 시간이면 인적이 드물거나 아주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시골산길과는 달리, 드문드문 선 가로등이 위안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묘하게도 산길을 걸어가다 보면, 이런 두려움은 이내 사라진다. 양옆에 늘어선 나무들이 든든한 벗들처럼 나를 지켜준다는 느낌이 들어서이다. 소나무, 상수리나무, 벚나무, 산사나무, 노각나무, 이팝나무… 하나같이 정겨운 유년의 동무들 같은 이름을 가진 나무들; 이들의 이름을 뇌이다 보면, 나 또한 전생에서는 이들처럼 정겨운 어느 이름으로 불리던 나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인지, 나무들이 나와 무관한 타자(他者)같지가 않다.
 그런데, 이들 나무들이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몇몇 상록수를 제외하고는 잎을 다 떨어뜨리고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겨울이기 때문이다. 산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작은 대숲에 있는 바위에 앉아 잠시 쉬기로 한다, 고질이 된 무릎 때문에. 바람에 서걱이는 대숲을 올려다본다. 한겨울인데도 대는 여름처럼 푸르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문득 상록인 잎을 가진 나무는 겨울이 춥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대를 나무로 분류할 수 있을지는 논란이 있겠지만.
 나무를 품평할 때 사람들은 늘 푸른 소나무나 잣나무 따위를 앞자리에 두고는 한다. 이 기준은 겨울에도 푸름을 유지하느냐의 여부에 두어져 있다. 대나무가 포함된 세한삼우 따위의 평가도 이런 사고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런 평가 기준의 전거는 아마도 논어에 있는 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라는 말일 터이다. 세상에는 이 구절이 ‘세밑이 되어 다른 나무가 다 시든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한 겨울에도) 푸른 것을 알게 된다’ 로 번역 유통되고 있다.
 이렇게 유통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고 저작권자인 공자가 눈살을 찌푸릴 번역이다. 정확한 번역은 ‘세밑이 되어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더디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 이다. 더디 시드는 것과 겨울에도 푸른 것은 뜻 차이가 엄연하다. 어쩌면, 소나무를 비롯한 상록수는 겨울에도 푸르지 않느냐, 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수 있겠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음을 식물학자들이 보증하고 있다: 상록수로 대표되는 소나무도 2년째에는 그 잎이 시들고 떨어짐을.
 내가 번역한대로 하면, 논어에 전거하여 이조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위 선비라는 자들, 또는 학자라는 자들이 인간가치를 재단하는 척도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기준에 혼란이 올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절개나 의리, 믿음 등을 지고한 가치로 강조하기 위하여 공자 말을 금과옥조로 인용한 경우에는. 하지만 이는 내 탓이 아니다, 나는 바르게 번역했기에. 더구나 공자 탓도 아니다. 왜냐하면, 공자는 진실을 말했는데 저들이 자의적으로 왜곡했기에.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기성가치를 전복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 말씀에 대한 풀이나 적용을 자의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이다. 상징대상이 된 나무로 돌아가 말하자면, 나무에 고상과 비천이 있어 겨울에 잎이 유지되거나 지는 것이 아니라 역할에 차이가 있어서라는 말이 된다. 부연하면, 소나무는 겨울에 푸르러 고상하고 가시나무는 겨울에 가시밖에 없어 비천하다고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말! 전나무는 전나무의 역할로 겨울에 미덥고 이팝나무는 이팝나무의 역할로 여름을 꽃피워 그 역할에 귀천은 없다는 뜻! 하여, 이를 우리인간에게 적용하여도 그 철리(哲理)는 동일할수밖에 없다는 대요(大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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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재 이현준 2014-01-09 23:50:55
새해 벽두부터 경남매일은 내게 큰 공부꺼리를 던뎌주고 있다. 필자 김시인께서는 어둑한 겨울 산길의 산책을 하면서도 줄서 있는 나무들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가치세계를 예리한 표현으로 우리들에게 들려 주고 있어 여간 큰 공부가 아닐 수 없다. 고마움이 참으로 크고 많다.

몽재 이현준 2014-01-10 00:00:25
공자께서 말한 글을 후세의 사람들이 진실된 해석, 정확한 의미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 해석으로 아는 척을 했으니...이 오류가 또 오류를...그리고는 종래에는 마치 올바른 해석으로 인식되어져 있는 일이 비단 이 문장 하나뿐이겠는가? 우리 말, 우리 글의 표현에서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외국어의 경우는 이러한 사례가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니 아찔하다.

몽재 이현준 2014-01-10 00:06:42
국어, 영어, 한한 등 사전을 찾아 보면 한 단어의 의미가 얼마나 많은가, 용처에 따라 그 의미가 확연히 다르게 사용되는 것임을 자주 본다. 해서 나는 지금부터라도 고전이든 어떤 글이든 그 의미를 가능한 작자가 생각하고 쓴 의미를 되씹어 보며 공부하리라 다짐해 본다.
좋은 글 쓰신 김시인께 감사드리고 게재한 경남매일에게 고마움을 보낸다.

강대선 2014-01-10 12:19:23
저도 가끔 작은 동산으로 산책을 나가곤 합니다.
저마다의 몸짓으로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나무들을 보며
나의 삶은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곤 한답니다.
곧은 소나무, 굽은 소나무 저마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마다의 삶은 각자의 역할에서 아름다운 것이겠지요.
오늘 산으로 산책을 다시 나가야겠습니다.
저마다의 나무에 애정을 가지고 들여다 보고
어루만져 주고 품어줘야겠습니다..

이서윤 2014-01-11 14:19:28
역활의 차이가 제 눈에 띕니다.
비천을 가리기전에 근본을 보는 눈이 있어야 역활의 차이도 가려지겠지요.

또 하나 지혜를 건집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