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새해가 되면, 새로운 꿈과 희망으로 몸과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 같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언제부터인지, 새해가 새롭게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인생을 알아가고 세월에 익숙해져 간다는 뜻일 터인데 어찌된 셈인지 나는, 일갑(一甲) 가까운 세월쯤 살아왔으면 인생과 세월에 익숙해질만도 하건마는,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생이 더 힘들게 느껴지고, 세월은 생경(生硬)을 넘어 두려움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지난 몇 년 나는 언감생심, 새로운 꿈을 꿀 엄두조차 내지 못해왔다. 꿈을 꿀 수가 없었으므로, 지금처럼 새해를 맞을 때에도, 희망으로 년초(年初)가 부풀어 오르는 일도 없게 되었다. 이는 어쩌면, 지난 몇 년이 내게 너무 힘들었던 세월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 연장선상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나는, 세월이란 반복되는 과하중의 날들, 무의미한 계절의 전이와 달과 해의 순환에 불과하다는 무력감에 휘둘리게 되었다.
물론, 이 무력감에 일방적으로 끌려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무력감에서 벗어나고자 때로 음악을 듣고, 때로 영화를 보고, 또 때로는 수험생처럼 책에 몰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일시적인 위안 혹은 도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문제는 여전히 내게 찰거머리처럼 붙어 있었고, 내 발은 여전히 현실의 땅에서 비틀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작은 소득은 있었다. 남들의 음악, 남들의 영화, 남들의 책이 내 무력감을 몰아내 줄 수는 없다는 사실의 확인이라는 씁쓸한 소득은.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생각했다. 일을 하면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길을 가면서도, 심지어는 잠을 자면서도. 나의 문제. 어떤 의미에서 이는 인간전체에게로 확대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문제가 없는 인간은 없을 것이기에. 살아가면서 우리 인간은 세 가지 형태의 문제ㅡ첫째 형태는 답이 있는 문제, 둘째 형태는 답이 없는 문제, 그리고 마지막 형태로는 답은 있지만 풀이는 없는 문제에 끊임없이 시달리며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이 세 가지 형태의 문제에 간단없이 시달린다. 첫 번째 형태의 문제는 비교적 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나는 목이 마르다. 샘은 십 미터밖에 있다. 이 경우는 걸어서 샘까지 가기만하면 된다. 물론 이 문제도 상대적일 수 있다, 다리를 다친 경우처럼. 이 경우, 문제는 세 번째 형태로 변이된다. 두 번째 형태의 문제는 현재까지의 경험칙으로는 답이 불가능한 문제다. 다음과 같은 경우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살고 싶다.
세 번째 형태의 문제는 전(前) 이자(二者)와 같은 항렬이지만 행을 바꾸어야 할 만큼 중차대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 형태의 문제에 가장 많이 부딪치고 가장 많이 고통 받기 때문이다. 전 이자는 사실 특별한 경우나 특별한 의지의 소유자가 아닌 한 크게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는 아니다. 노력하면 답을 구할 수 있거나, 답이 없다는 경험칙을 즉자적으로 감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後) 일자는 노력이나 감수만으로는 풀이가 가능하지 않다.
다음과 같은 경우들이다. 진학하고 싶지만 가정 경제가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등등등… 문제가 상대적인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욕망과 현실의 충돌이 되겠다. 내 문제들 또한 이 지점에 있다. 답은 있되, 그 답을 가질 수는 없는 현실. 이 상태가 생활을 흔들 정도가 되면 인간은 무력감에 비틀거리게 되어, 삶은 더 힘들어지고 세월은 생경을 넘어 두려움이 되어 버린다. 그러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는 것일까?
나 자신 오랜 세월 무력감에 비틀거려왔으므로 이 질문에 답변할 자격이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먼저 겪은 자의 동병상련의 눈으로, 다음과 같은 말은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세월이라는 말에 이 문제의 풀이에 대한 어떤 암시가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보통 시간의 연속을 세월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 인지 범위 안에서는, 세월에 시작과 끝은 없다. 세월은 우리 앞에도 있었고 우리 뒤에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세월을 고인들은 날과 달 계절과 해로 나누어 놓았다.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점은, 종교적인 이유에 기반한 헤지라력(曆)같은 경우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양(洋)의 동서를 불문하고 한해의 시작을 한 겨울에 놓았다는 점이다. 나는 이 의미를 한 겨울에 봄의 씨가 있다는 뜻으로 읽는다. 이는 새벽이 어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만큼이나 시사적이다. 그렇다! 어둠속에서 빛이 태어나고 한 겨울에 봄이 잉태된다.
이는, 만약 우리가 어둠속에서 비틀거리거나 겨울 한파에 떨고 있다면, 우리가 서 있는 그 자리가 새벽이 시작되고 봄이 시작되는 자리일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불현듯, 서경(書經)에 있는, 해가 돋는 곳이라는 뜻인 우이(嵎夷)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이 창밖으로 갑오년(甲午年) 새해가 밝았기 때문이다. 갑오에서 갑(甲)은 색깔로는 푸른색을 뜻하고 오(午)는 말을 뜻한다고 하니 올해는 푸른 말띠해가 되는 셈이다. 올해에는 독자제위가 서있는 모든 자리가 우이(嵎夷)가 되고, 푸른 말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푸른 초원과 같은 세월이 펼쳐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