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없는 백비에는 아직도 선비 기개 은은…
글 없는 백비에는 아직도 선비 기개 은은…
  • 음옥배 기자
  • 승인 2013.12.16 2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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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때 충절 지킨 함안 모은 이오 선생
▲ 함안군 산인면에 위치한 경남도기념물 제56호 고려동 유적지.
왕조 유민 상징 담 안은 고려동 표방
태조 조정서 벼슬 권유했지만 고사

 흔히 대부분 고장이 충절의 고장임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함안이야말로 고려, 조선을 거쳐 충신이 즐비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수와 여러 의병장이 힘을 합쳐 왜적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전국 최고의 의거로 평가받는 3ㆍ1독립만세운동을 일으키는 등 역사로서 충절을 증명하고 있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을 다하기 위해 벼슬을 버리고 은거해 함안에 고려동(高麗洞)을 세우고 자신이 한 일이 없다며 유언으로 글자 하나 없는 백비를 세우게 한 모은(茅隱) 이오(李午)선생이야말로 충절의 대명사로 존중받아야 할 인물이다.

 특히 모든 사람이 사후에나마 자신의 행적이 드러나기를 원하는 것이 인지상정인데 오히려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얼 쓰겠냐며 백비를 세우게 한 그 정신이야말로 선비의 기개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함안을 대표하는 충절의 표상이 되고 있다.

 선생은 재령인(載寧人)이며 성균관진사(成均館進士)이다. 고려 사재령(司宰令) 이일선(李日善)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뜻이 크고 뛰어난 기개가 있었고 세속에 구속을 당하지 않았으며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의 문하에 있으면서 학문에 독실해 당시의 학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하니 포은(圃隱)선생께서 벼슬하기를 권하자 대답하기를 “시기가 적절하지 못합니다”라고 하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려가 망함에 이르러 사(社)가 옥(屋)이 되니 제현(諸賢)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결의를 표명했다가 다시 함안으로 내려와 산인면에 고려동을 짓고 은거했다.

 선생은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해 담 밖은 신왕조인 조선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임을 표방했으며 고려동 앞의 고려전과 고려답에서 생산되는 것으로 자급자족하고 조선의 음식은 입에 대지 않았다.

 후에 태조(太祖)의 조정(朝廷)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또 아들 개지(介智)에게 경계하기를 너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 벼슬할 수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 절대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내 신주도 고려동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유명에 따라 아들은 끝내 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쳤다.

 또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 밖에 장사할 것인즉 혹 조선왕조의 땅에 묘비를 세울 경우에 나라를 잊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는가, 나의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한 자 새기지 마라’고 해 자손들이 묘비를 글자 한 자 없는 백비(白碑)로 세웠다.

▲ 모은(茅隱) 이오(李午) 선생 유언으로 만든 백비.
 이 백비는 가야읍 혈곡리 인곡 저수지 위편, 인산재(仁山齋) 뒷산에 있다. 모형은 장방형의 비(碑) 위편에 연꽃무늬 갓을 씌웠으며, 화강암 재질에 전체의 높이 95cm에 갓이 15cm를 차지하며 넓이 40cm, 두께 15cm로 갓과 함께 통돌로 돼 있다. 우측 아랫부분은 뒤가 파손돼 두께가 8cm이며, 갓의 넓이는 45cm로 아주 검소하고 작은 모양의 비석이다.

 1만 8천442㎡의 고려동유적지는 1983년 8월 2일 경남도기념물 제5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모은 선생은 이곳에 와서 나라를 잃은 고신(孤臣)이 부국(扶國)하지 못한 마음을 한으로 씻으며 숲 속에 자미화가 만발(滿發)한 것을 보고 아침저녁으로 거닐면서

 滄溟夜夜迎孤月 창명야야영고월 밤마다 바다에서 뜨는 외로운 달을 맞이하면서

 杞鞠年年闢小畦 기국연연벽소휴 해마다 구기자 국화 심을 작은 밭을 개간하네

 回首未逢堯舜世 회수미봉요순세 돌아봐도 요ㆍ순시대는 만날 수 없으니

 甘心不讓牧樵제 감심불양목초제 목동과 나무꾼 동무됨을 만족하게 여기네

 라는 시구(詩句)를 읊으면서 자신의 슬픈 회포를 달래던 자미단(紫薇壇)과 순조(純祖) 33년(1833)에 선생의 14대 후손인 유호(有顥)가 창건한 자미정(紫薇亭)이 있다. 또한 선생이 터를 잡아 지은 종택(宗宅)과 손수 농사일하며 자급자족을 했던 9만 9천여㎡의 고려전답(田畓), 고려동담장, 율간정(栗澗亭) 등이 있으며 모은의 현손부(孫婦) 여주이씨가 몸이 아픈 시어머니를 위해 지극정성 기도하자 전복이 나왔다고 하는 복정(鰒井)이 있다. 이 복정은 600년 전 모은 선생이 파서 사용한 것으로 어떤 가뭄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영남삼은이 단구 김후와 함께 한 구절씩 지은 시가 전한다.

 幽篁園裏數叢花 유황원리수총화 깊은 대밭 속 대여섯 떨기 꽃이

 潤色山村寂寞家 윤색산촌적막가 산촌 적막한 집에 색을 더하고

 入室更看樽有酒 입실갱간준유주 방안 술동이에 술 있는 걸 보니

 宦情從此薄於紗 환정종차박어사 벼슬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네.

 두문동서원은 표절실(表節室)에 순절(殉節), 항절(抗節), 정절(靖節)의 3반(三班)으로 나눠 제현을 봉안하고 있는데 선생은 항절반에 봉안됐다. 또 함안의 인구서원(仁衢書院)에서도 향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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