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6:40 (금)
대마도 탐방과 역사의식
대마도 탐방과 역사의식
  • 박태홍
  • 승인 2013.11.18 21: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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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태 홍 본사 회장
 옛 사람들이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들을 많이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잠자리와 먹는 것이 일상과 다르고 주위환경이 몸에 베어 있지 않은 생소함 때문일 게다. 이렇게 보면 여행도 그 범주에 드는 것 아닌가 한다. 필자는 하늘산악회가 기획한 1박 2일 코스의 대마도 여행을 산악회원 35명과 함께 다녀왔다.

 서두에서 밝힌 대로 고생길을 나선 것이다. 지난 3일 새벽 5시 30분 진주공설운동장 제1 정문 앞에서 모인 산악회원 35명은 회원이 경영하는 식당에서 동탯국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동경과 미지의 세계 대마도를 향해 진양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산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한 시간은 상오 8시경 출국수속을 마치고 오션플라워에 몸을 맡기고 대마도로 출발한 것은 상오 9시 30분 대마도 히타카츠 국제여객터미널에 도착은 상오 10시 40분이었다.

 오션 플라워가 쾌속선이어서 출발 후 1시간 10분 만에 도착한 것이다. 히타카츠 터미널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관광버스로 관광은 시작됐다. 첫 번째로 간 곳이 일본의 아름다운 100대 해수욕장 중의 하나인 미우다 해수욕장. 계절의 탓인지는 몰라도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고 한국의 어느 해수욕장과 다를 바 없는 그냥 평범하고 조그마한 해수욕장에 불과했다.

 그다음 일정이 시라타케 산을 등반할 예정이었으나 현지사정으로 인해 대마도 중심가에 있는 조선국 통신사지비를 둘러봤다. 그 당시의 화려한 행렬은 간 곳이 없고 그때를 기리는 비석 하나만이 우뚝 솟아 있었다.

 비석 앞 10m 전방에는 최근에 세운 듯한 50cm 정도의 고려문이라는 표지석 하나가 고작이고 통신사지비 뒤켠에는 유물들과 관계자료를 모아둔 전시관 한 곳이 있었을 뿐이다.

 조선 후기의 통신사는 선조 14년(1607년)부터 순조 11년(1811년)까지 12차례 사절단 파견이 있었다 한다.

 이들 통신사들의 파견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조선의 문물을 일본에 전수하는 것이 첫 번째 임무였고 다음으로는 일본인들이 원하는 문물을 제공해 조선의 침략과 노략질 욕구를 억제토록 한 것이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일본의 정세를 감시하며 침략의 위험을 사전에 파악하는 것도 이들 통신사들의 또 다른 임무였다 할 수 있다. 서기 1600-1868년까지 일본은 에도 또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였기 때문이다. 조선국의 사절단 규모는 300~500명 정도이며 한양에서 에도 막부가 있는 곳까지는 6개월에서 1년이 걸리기도 했다는 기록이 각종 사료집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다.

 조선국 통신사지비를 뒤로하고 대마도 시가지를 벗어나 작은 골목길을 몇 차례 접어드니 수선사란 절이 나왔다. 이곳에는 대한인 최익현 선생 순국지비가 우뚝하게 서 있었다. 면암 최익현 선생이 살다간 1833년부터 1906년까지의 시대는 의식의 지각변동을 요구한 격변기였다 할 수 있다.

 광화문 앞의 도끼 상소로 후세들에게 널리 알려진 면암은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에 붙잡혀 대마도에 감금된 뒤 순국한 연유 때문인지 이곳에 선생의 족적이 남아있었다.

 면암 선생의 묘지는 충남 예산군 당시면 관음리에 위치해 있다.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면암의 체취를 흠뻑 느낀 우리 일행은 옷길을 다시 한 번 여미고 수선사 문을 나서 지정된 대마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집 떠난 고생은 이때부터였다.

 좁은 객실을 차치하고 욕실은 비좁아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2인 1실의 방 배정에 문제가 있었다. 가이드를 포함 총인원은 36명. 독방을 배정받지 못한 필자의 파트너가 71살로 5상이나 연상이었고 담배 또한 태우지 않아 흡연자인 나로선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집행부에 방 배정을 다시 부탁하고도 싶었지만 나와 함께 배정된 그분의 기분을 고려해야겠다는 생각에 뜬 눈으로 밤을 새는 불편을 겪어야만 했다.

 둘째 날 만제키바시(만관교)ㆍ쓰시마 전망대ㆍ가미자카 공원을 관광하고 덕혜옹주 결혼붕축기념비가 있는 시내를 되돌아왔다.

 이왕조 종가 결혼봉축기념비가 서 있는 유명산 기슭은 옛 그대로인데 덕혜옹주의 가련한 삶의 여정을 다시 보는 것 같아 씁쓸하기도 했다.

 덕혜옹주는 조선군 제26대 고종과 후궁 사이의 딸로 태어나 대마도주 종가집안에 시집을 간 비운의 옹주다. 이날 우리들은 유명산(아리아케야마)을 등반하고 만 이틀의 역사 탐방과 함께한 관광을 마치고 쾌속선 코비호에 몸을 싣고 부산으로 향했다.

 뱃길ㆍ찻길ㆍ잠자리도 불편한 여행이었지만 역사의식을 일깨워 준 대마도 산행 및 역사 탐방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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