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에도 쾌활함 잊지 않고 난관 극복하며 꿈 향해 도전
장애에도 쾌활함 잊지 않고 난관 극복하며 꿈 향해 도전
  • 이동근
  • 승인 2013.11.17 2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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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작가 이동근 힐링스토리

▲ 여행작가 이동근
힐링스토리수많은 인연 속 도움이 오늘 나 만들어

 이번 인터뷰 대상자를 선정하며 가장 고심 했던 부분은 진솔함이었다.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줄런지 알 수도 없는 일이었다. 환자가 드나드는 바쁜 진료시간 그의 일상은 분주했고, 환자를 대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그가 의사라는 사실보다 평범한 옆집 아저씨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의 인터뷰를 기다리는 동안 스스로 들지 않았던 마음에 확신이 생긴 이유는 그와 환자가 나누는 대화가 너무나 정감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비춰지는 것들을 보며 그와의 인터뷰에 그는 참 멋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옆집 아저씨’라 불리는 황수범 원장님 그의 이야기를 듣는다.


 지난 1956년 울산 근교의 바닷가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님의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6ㆍ25휴전 3년 후, 막 걸음을 배울 시기에 소아마비에 걸렸고 이후로는 정상적인 보행이 불가능한 ‘지체장애2급’의 장애인이 되었다. 하지만 선천적인 쾌활함으로 하루 종일 장난치며 놀기 좋아했던 개구쟁이였다.

 언젠가 중학교 동창을 만났었다. 그 당시에는 몰랐었지만 나 같은 장애를 갖고도 학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명랑했었다는 사실이 지금 생각하니 대단했었다라는 말을 들었다.

 선생님께서는 수업이 지루해 졸고 있는 학생들이 많을 때면 언제나 나를 불러내어 만담을 시키곤 하셨다. 웃고 떠들고 친구들과 노느라 장애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낙천적인 성격이 나의 인생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는 몰랐던 장애에 대한 인식과 배려를 커면서 조금씩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 당시에는 나 역시 그 장애라는 것이 내게는 작은 벽이 되리라고는 생각한 적도 없었다. 소풍가기 전날, 비라도 내리지 않을까 모든 친구들이 조마조마 했었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보통 10리(4km) 이상 걸어서 산으로 올라가야 했기 때문에 나는 소풍을 한번도 가지는 못했다.

 친구들과 놀기 좋아했던 나는 그 큰 운동장에서 혼자 놀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중학 입시, 200점 만점에 체육이 20점이었다. 나는 턱걸이에서 5점밖에 얻지를 못했으니 명문중학교에 입학 하기 위한 15점은 내게는 너무나 큰 산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하늘이 도왔는지 가까스로 합격할 수 있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라디오에서 들려온 수험번호 4번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를 말이다.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부산고등학교, 경남고등학교 합격이 가능한 전교 20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부산고등학교 커트라인이 193점이었다. 학과목을 모두 만점을 받더라도 체육에서 5점이니 185점 이었기 때문이다.

▲ “인생에서 수많은 인연이 큰 힘이 됐다”고 말하는 황수범 원장.
 항상 밝고 명랑한 나였지만 그 넘을 수 없는 큰 벽 앞에서는 좌절해야만 했다. 하지만 원망은 없었다. 그때는 나라에서 정해놓은 법이, 부모님의 말씀이, 선생님의 말씀이, 철칙인 줄로만 알던 시기였으니까…. 도전할 목표가 없으니 성적도 많이 떨어졌다. 결국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그리고 대학입시가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간절히 원했던 교사직도, 공무원 시험도, 장애인에게는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다. 적성에 따른 선택은 적어도 장애인에게는 불가능했던 시기였다. 졸업 후,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후, 문과에서 이과로 전환을 했다. 긴긴 재수생활에 들어갔다. 당시 (1976년대)에는 시험에 합격해도 실험과 실습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신체검사에서 불합격을 시키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지난 1980년 세계 장애인의 날 제정을 앞두고 문호가 개방되면서 졸업 후 5년 만에 지체장애인 학생 5명이 동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시험에 합격하고서도 마지막 신체검사 결과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금도 생각난다. 3차면접을 보던 그때, 어느 면접관이 갑자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 면접관이 수화기에 대고 했던 말은 아직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다.

 ‘장애인 문호 개방이라 해도 중증 장애인까지 모두 입학 시켜야 하느냐?’라며 이야기를 하던 모습을 말이다.

 내가 꼭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레지던트 지원을 할 때에도 어려움이 컸다.

 그때도 의사가 되었으니 이제 그냥 의원을 개원하라는 주변의 말씀도 있었지만,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새로운 영역에 대한 욕구를 포기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소아과 전문의 과정을 마쳤다. 아마도 꿈이 컸나보다. 긍정적인 내 성격이 큰 역할을 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내 인생에서 만난 수 많은 ‘인연’들 중에 잊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그분은 바로 정립회관을 창립한 ‘황연대’ 선생님이다.

 소아마비 장애를 딛고 소아과 전문의를 취득한 여의사이시기도 하다.

 마산에서 지체장애 수험생을 위한 강연을 하시면서 “내가 이름대로 여러분의 연대장이다. 우리가 많이 불리하고 모든 여건이 좋지는 않지만 포기하지 말고 얼마만큼 일반인에 근접할 수 있는 지를 보여주라”고 하셨다. 나는 그 말씀을 아직도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다.

 청와대, 문교부 장관, 대학 학장을 찾아다니면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불합격시키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고 다니셨던 일화는 지금도 유명하다.

 내 인생에서 어쩌면 나는 그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타협을 할 때와 맞서 싸워야 할 때의 의지를 이어받은 것 같다.

 나의 그러한 삶을 이곳 매축지에서 이어가고 있다.

 당신을 위해… 마을 주민을 위해… 나의 재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보람차고 기쁘다.

 마음이 가난하고 소박한 주민들이 부족한 나에게 의지했을 때, 한없이 겸손해 짐을 느낀다. 장애나 질환이 있는 분이 나로 인해 삶에 용기를 얻을 때 보람을 느낀다.

 급속한 고령화 시대의 길목에서 심신이 지치고 소외된 이웃에게 온기를 전해주는 그런 따스한 이웃이 되고 싶다.

 그들에게 나는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 같은 그런 의사가 되길 원한다. 하루가 더없이 소중하다.

 질병으로 나를 찾아오는 사람보다 내게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는 환자들도 많이 있다. 그들에게서 나는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따로 있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의사와 환자로서 그들과 대면하고 있는 순간보다 나는 그런 순간들이 더 그들에게 힘을 주는 것만 같다.

 아주 순수하신 마음을 지닌 이곳 마을 주민들을 통해 오히려 치료를 해주는 의사는 내가 아닌 바로 그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사는 진료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병원이라는 익숙치 않은 공간 안에서 편안하게 치료를 받고 위로를 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곳 마을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며 그것은 곧 나의 신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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