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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송준의 명인열전 - 만화가 최경탄
작가 송준의 명인열전 - 만화가 최경탄
  • 경남매일
  • 승인 2013.11.05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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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계 살아있는 전설… 대표작 ‘청춘극장’ 인기
1984년 반도만화학원 히트로 전국 유사학원 생겨
삼천포 출생… 만화가게 주인 준 만화책으로 꿈 키워

 한국 만화계의 자료 보물섬이라고 할만큼 뛰어난 천재 만화가가 있다. 그 자료는 보존 장서로서 가지고 있는 소장 자료가 아니라 그분의 기억 속에 그리고 자신의 추억 속에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만화계의 산역사”

 그래서 원로 만화가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만화가들 사이에서도 이렇게 회자되는 말이다.

 그런 분이 아직도 살아계신 것이다. 즉 우리는 만화가로서 만화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다른 선구자들처럼 훌륭한 만화를 많이 그려낸 뛰어난 만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만화의 이면세계를 알려주는 ‘만화역사의 기억탑’ 내지는 ‘만화의 산역사와 전설’이라고 그를 칭하는 것이다.

▲ 최경탄 화백의 작품들
 서울 신림동에 살고 있는 최경탄(70) 화백은 고향이 삼천포이다.

 밤늦게 선생의 자택을 찾았으나 60대 후반의 나이에도 상당한 미인이신 사모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어 몸둘 바를 몰랐다.

 그래서 느낀 것이 있다. 한 명의 만화천재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저런 미녀가 내조를 기막히게 잘해주었구나 하는 점을 말이다.

 그런데 사모님의 말씀이 걸작이었다.

 “저분이 펴낸 만화잔치 때문에 망했어요.”

 즉 지난 1988년에 펴낸 월간 만화잡지로 만화역사에 희귀본으로 길이 남을 ‘만화잔치’가 결국 쪽박잔치나 빚잔치로 남았다는 말이다.

▲ 최경탄 화백
 실제로 3호인가 하여튼 몇 번 내고 폐간해 결국 망했지만 그래도 최 화백과 사모님은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그것은 그 이전에 그만큼 유명 만화가로서 또한 만화학원 원장으로서 활동하면서 당대의 유명한화가들처럼 만화로 돈을 많이 벌어놓았던 탓이었기에 이후 그런 몇 번의 실패를 회복하거나 만회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른 유명 만화가들처럼 최 화백에게도 나름대로 빛나는 전성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70년대 말이었다.

 결혼 후에 최 화백이 최전성기 시절을 함께 보내던 주간경향에 김래성 원작 청춘극장을 스토리로 한 만화 연재물 ‘하얀 그림자’를 한창 인기리에 연재할 때 그 원고를 경향신문에 직접 갖다준 분이 바로 그의 부인 즉 지금의 사모님이었다.

 “당시 주간경향에서는 전투 장면이 너무 많이 나온다고 해서 제가 신문사 앞의 다방에서 담당기자와 상의해서 내 마음대로 내용을 잘랐어요. 그런 식으로 제가 대충 편집을 해서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매주 한번씩 갖다주는 원고가 처음부터 마지막 내용까지 전투장면이니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그 당시 꽤나 두둑한 원고료를 받던 최고의 인기만화를 연재하면서도 부인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하여튼 우여곡절 끝에 하얀그림자를 마쳤다.

 화제작 ‘하얀그림자’는 최 화백의 대표작으로 제목을 ‘청춘극장’으로 해 지난 1979년 11월 30일에 단행본으로 도서출판 현실사에서 상권과 하권 이렇게 2권이 나왔다.

 주간경향에 만화를 연재한 최 화백은 이후 자신감을 얻어 한국 만화산업과 애니메이션에 도약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기도 했다.

 즉 지난 1984년 당시 만화 교육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최초로 관인 반도만화영화학원을 설립해 크게 성공했다.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비행기만 왕복 수백 회의 탑승기록을 세웠고 비행기에는 그의 지정 전용좌석이 생길 정도로 대우를 받기도 했다.

 그만큼 바쁜 그의 동선은 결국 만화전문학원이 서울을 비롯해서 부산과 인천 등 전국에 5곳의 지사를 세울만큼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 최경탄 화백의 대표작 ‘청춘극장’
 반도만화학원이 돌풍을 일으키면서 학원 출신들이 애니메이션산업의 전반에 투입됨으로써 한국의 애니메이션은 크게 약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반도만화영화학원이 히트하자 전국에 유사한 학원이 생기는가 하면 대학에서도 관련학과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만화과와 애니메이션과가 신설되는 대학이 많아졌고 심지어는 경기도 광주에 만화전문 고등학교도 생겨났다.

 그는 만화 교육 초창기에 대학에서 만화전문 교수가 필요해지자 한국예술신학교와 대전목원대학교 등의 겸임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한국의 애니메이션 수준은 현재 일본에 버금간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최 화백이지만 그에 대한 평가는 살아있는 한국만화계의 역사이며 살아있는 전설인 것이다.

 지난 1987년에는 ‘갱생군’으로 법무부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고 지난 1988년에는 월간만화 ‘만화잔치’를 펴내면서 그의 만화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지폈던 것이다. 그러나 사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너무 무리하게 많이 찍어 결국 큰 손해를 본 만화잡지였다.

 ◇ 만화로 시작한 세상

 이런 우여곡절이 없었다면 어떻게 그런 만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길 것인가. 하여튼 최 화백은 작은 항구도시 삼천포에서 태어난 것이다. 어린 시절의 이름이었던 최부진은 당시 양복점을 운영하던 집에서 지난 1944년 10월 24일에 출생해 구김살 없이 삼천포의 아이로 성장했다.

 그가 만화에 눈을 뜬 것은 양복점 옆에 새로 이

사를 온 피난시절의 만화가게에서 비롯된다.

 틈만 나면 만화방을 찾았던 그는 해방공간의 천재만화가 정현웅의 수호전 시리즈 ‘노지심’을 비롯해 뒤이어 나온 추동식 선생의 장구박사, 미국 번안물수퍼맨, 저자이름이 기억 안나는 ‘쫀 왕자의 모험’, 정한기 선생의 ‘초롱 어사’, 저자를 알수 없는 ‘꾀돌이 일등병’, 김성환 선생의 ‘사육신’, 최상권 선생의 헨델박사, 김원빈 선생의 ‘태백산의 비밀’, 김기율 선생의 ‘도토리의 모험’, 김의환 선생의 철수의 모험, 작가 미상의 ‘정의의 흰독수리’, 작가 미상의 털보 아저씨 등 수많은 작품을 읽었다.

 그러다 만화가게가 이사가면서 그 주인이 주고 간 50권의 만화가 어린 소년의 마음에 꿈과 상상의 세계를 열어준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화는 그의 인생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의 마지막 하일라이트가 될 대하만필 ‘인생만화경’ 연재도 결국 내용이 한국만화 이면사이기 때문에 더욱 의미가 깊은 것이다.

 그 시작도 6ㆍ25 전쟁의 공비이야기로부터 시작되는 것도 바로 어린 시절의 이야기로 인생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이기도 하다. 추억의 소달구지가 아니라 인생역정의 상징적인 장면인 처참하게 죽은 공비를 실은 소달구지를 우선적으로 삽화로 풀어낸 것이다.

 그는 이런 장면을 보고 밤새 바람벽에서 피흘리고 죽은 공비가 나타나서 괴롭힘을 당해 결국 병원까지 갔던 악몽이 있었던 것이다. 통영을 노래한 시인 백석의 명작시 ‘흰바람벽이 있어’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더욱 절실하게 이해하는 것도 바로 그런 연유인 것이다.

 외갓집과 쇠줄이 아저씨 그리고 고향과 어머니의 추억 등등을 통해 그는 성장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잠들 때마다 들려주신 어머니의 이야기와 어릴 적 본 영화와 연극도 그의 재능을 더 빛나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집에 TV가 없던 그 시절에 만화 이외에 그의 정서를 채워준 것은 사실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잠결속의 말과 더불어 어머니는 아예 그를 데리고 극장에 자주 가곤 했던 산교육의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19세이던 지난 1963년 초에 최경탄은 삼천포에서 고등학교 졸업을 하는 둥 마는 둥 마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의 만화둥지를 떠나서 서울로 향했다.

 그것은 만화에 뜻을 두고 만화가의 꿈을 펼치려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던 것이다. 그의 손에는 만화원고까지 들려져 있었다. 그것은 만화계에 입문하려고 평소 실력을 다해 그린 만화를 들고 과감하게 당시 신촌역 앞에 있던 진영출판사를 찾아갔던 것이다.

 여기에서 박부길 선생을 소개받아 그의 문하생으로 6개월가량 실력을 익혀나가는 것이 그의 만화가 인생의 출발이었다.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만화가 문하생 시절에는 스승인 박 선생의 원고에 배경과 먹칠하는 것 등을 돕고 아울러 출판사의 잔심부름도 했다.

 ◇ ‘항구의 결투’로 만화가 데뷔

 고진감래라고나 할까. 고달프고 힘든 일이 몸에 익을 무렵에 그에게 일찍 행운의 길이 열렸다. 바로 지난 1963년 말경에 미문사에서 나온 ‘항구의 결투’로 만화로 만화계에 정식으로 데뷔를 하였던 것.

 이후 66년도에는 월간 새벗에 ‘콩치 팥치’와 ‘마법사 공주’ 등을 연재하면서 만화가로서 더욱 확실한 입지를 다지게 되었다. 69년에는 ‘유관순’과 70년에는 ‘마지막 종소리’등을 단행본으로 펴내기도 했다.

 74년에는 SF만화인 ‘파이파 위기일발’을 펴내었고 결혼 후에 그의 전성기가 열리게 되었다. 즉 주간경향에 매주 ‘하얀그림자’를 연재하면서 만화시장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

 이후 ‘원시소년 잠바’와 보물섬과 소년경향에 연재하였던 82년도 작 ‘고추장군’ 등 이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작품을 단행본으로 그리고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였다.

 또한 반도만화영화학원이 히트하자 전국에 다른 유사한 학원이 생기는가 하면 각 대학에 만화과와 애니메이션과가 신설되는 대학이 많아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만화잡지가 ‘만화잔치’를 펴내면서 ‘쇠줄이 아저씨’라는 제목의 만화도 연재를 하였다. 쇠줄이 아저씨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있는 분의 이름을 딴 내용은 약간 다른 만화연재물이었다.

 만화잔치는 접었지만 그 만화전문학원의 여파는 컸다. 심지어는 경기도 광주에는 만화전문 고등학교도 생겨났다. 결국 그는 한국 만화산업과 애니메이션에 도약의 바람을 일으킨 주인공이 되었다.

 ◇ 기독교 신앙생활과 발명특허까지

 한편 최 화백은 국민학교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다진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선교 만화도 다수 발표했고 결국 한국만화선교회 부회장과 지난 1995년에는 한국예술신학대학 만화과 교수를 역임했다. 즉 만화 교육 초창기에 각대학에서 만화전문 교수가 필요해지자 최 화백을 교수로 불렀던 것이다.

 이후 한국만화가협회 부원장과 지난 2003년 대전 목원대학교 겸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최 화백이 천재라는 것은 만화방면 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역시 나타난다. 즉 평소에도 그는 만화 이외의 분야에서도 천재소리를 듣는 말 그대로 발명의 아이디어 뱅크다.

 유명 만화가에게 그런 기막힌 재주가 있었다는 것이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60대가 되면서 6년간의 긴 재판이 있었다. 어느 불쌍한 목사를 도와준 것이 화근이었다.

 그것은 목회자라고 해서 믿었던 그 목사에게 억대의 사기를 당하지 않았다면 필경 인기특허가 돼 상용화 되었을 뻔한 개발특허 ‘안경이 필요없는 3차원 입체영상기’와 그 바람에 같이 무산이 된 풍력발전 신기술인 ‘무한동력기’ 개발특허까지 현재 보유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지막까지 인생은 만화경이라는 것을 그는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새로운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고 있다. 만화가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린 자신의 삶을 인생역정으로 삽화로 그리고 글로 풀어내는 작가로서의 인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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