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스님을 추모함(5)
석정 스님을 추모함(5)
  • 김용태
  • 승인 2013.10.14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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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산 김용태 시인ㆍ전 신라대학교 총장
 6. 김해공항에서 어머니를 그리는 얘기를 듣다.

 1981년 이른 여름 아침, 스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강의가 없는 날이 언제냐고 물으신다. 그래서 이미 1학기 강의는 종강을 했다고 했다. 그랬더니 “나하고 김해 공항에 좀 같이 가실 수가 있겠습니까”하고 물으신다.

 “그럼 제가 곧 모시러 가겠습니다”하곤 바로 스님을 모시러 갔다.

 말씀의 내용인 즉 미국의 LA에 있는 고려사에 송광사의 스님이 주지로 있는데 그 스님이 ‘신중탱화’를 주문해, 완성해 공항에 가서 부쳤는데, 검열과정에서 문화재로 오인돼 발송이 유보됐다고 연락이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단 같이 가보자고 하고 스님을 모시고 공항으로 갔다. 가서 검열관계 담당자를 찾아보았더니 마침 그 사람이 내가 있는 대학의 사학과 강사로 나오는 분이었다. 반가워했다. 나도 반가웠다.

 나는 대뜸,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현대의 작품과 문화재를 식별하기가 그렇게도 어렵습니까?”하고 투정 비슷한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는 “하도 작품이 문화재같이 보여서 일단 구체적인 확인의 절차가 있어야 반출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사실 확인서’라는 제목으로 몇 자 적어준 일이 있다. 그렇게 해 다시 ‘익스프레스’항공으로 발송하는 데까지 3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기다리는 시간에 스님께서는 최초로 어머니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어머니는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때가 3ㆍ1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918년이라고 했다. 그리고 의사가 되고 싶었는데 어머니의 외숙부가 돌아가시게 돼, 일본의 의과대학으로 유학을 가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하셨다. 그런데 이때, 외조모의 소생이 모두 9명이었는데 모두 다 차례로 죽고 오직 어머니만 살아남게 됐단다. 외할아버지가 이를 안타까이 생각하시고 금강산 여행이나 하고 오라고 보냈단다. 이때 어머니의 6촌 여형이 비구니가 돼 금강산 신계사의 암자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금강산 여행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란다.

 신여성을 자처하던 어머니는 금강산 신계사 보운암에서 당시 금강산에서 명망이 높았던 석두보택 선사(석정스님의 친부)를 만나 보게 됐단다.

 처음엔 불법의 이치도 잘 모르고, 그 남자 중을 거만한 중으로 생각했는데, 차츰차츰 자신도 모르게 이 스님의 위력에 이끌려서 자청해 이 스님을 시봉(모시는 일)하게 됐단다. 그렇게 하다가 무슨 인연인지 어머니가 자신(석정스님)을 잉태하게 됐단다. 그래서 어머니 나이 39세, 석두선사가 47세였던 무진년에 자신이 태어나게 됐단다.

 석두선사는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에 속가를 얻어 해산처를 마련해 줘서 이곳에서 스님(석정스님)이 태어나게 됐고, 이후 석두선사는 금강산 신계사에서 5리쯤 떨어진 봉래동 별장 아래 토막 한 채를 짓고 모자가 살도록 해 줬단다.

 세 살쯤 됐을 때 스님 한 분이 가끔씩 오셨는데, 어머니는 공손히 절을 하면서 맞이하셨고, 아들에게도 스님이라고 부르도록 해 그 스님을 계속 스님으로만 불렀다고 한다.

 자신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번도 아버지라는 단어를 써본 일이 없었고,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한 일도 없이 어머니로부터 한글도 배웠고 한문도 배웠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어린 소년시절부터 혼자서 놀이를 한다는 것이 부처님 상을 그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어린 소년시절을 금강산에서 보내고 후일 아버지인 석두스님이 송광사에 주석하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서 정식으로 상좌로 출가하게 됐고, 여기서 또 호남 조계산파의 화맥을 이은 대불모 일섭님의 정식 제자가 되기도 했다는 얘기도 하셨다.

 지금까지 마음껏 화필을 운용해 보았기에 아무런 바랄 것도 없으나 단 아들을 기르면서 자신의 인생을 다 바친 어머니를 봉양해보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고 하셨다.

 어머니는 38선이 갈리고 끝내 남하하지 않으시고 혼자 계시다가 돌아가셨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말할 수 없이 아팠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 아픈 마음을 모두 불화를 그리는 일로써 승화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넘었는데 얘기를 해주시는 스님도, 얘기를 듣는 나도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스님께서 함께 ‘선주산방’으로 가자고 해서 따라 갔다.

 조금 앉아 있으니 보살이 콩국수를 만들어 왔다. 맛이 좋아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 허리띠까지 풀었는데도 숨이 가쁘기까지 했다.

 “오늘은 정말 좋은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후일 제가 스님에 관한 글을 쓰게 되는 날이 있으면 오늘 들은 얘기가 참 좋은 자료가 되겠습니다” 이런 말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지금 이런 글을 쓰니 감회가 더욱 새롭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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