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스님을 추모함(1)
석정 스님을 추모함(1)
  • 김용태
  • 승인 2013.10.07 20: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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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산 김용태 시인/전 신라대학교 총장
 1. 스님의 입적

 지난해 12월 20일 우리 시대의 최고 불화작가인 석정스님께서 세수 84세로 입적했다.

 스님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188호 기능 보유자이기에, 국가적으로도 애석한 일이고, 불교계에서도 스님의 경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무척 슬퍼했다.

 나는 스님과 여러 가지 면에서 잘 통했기에 퍽 가까운 처지였다.

 그러나 나는 스님의 입적 사실을 당시에는 전혀 몰랐고, 신문을 통해서만 알게 됐다.

 신문을 보니, 유언에 따라서 법구(法軀, 시신)도 동국대 병원에 기증했고, 장례절차도 치름이 없었다고 한다.

 정말, ‘보살의 가시는 모습을 보이셨구나’하고 나는 혼자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신문의 기사를 보고, 시봉하던 보살에게 즉시로 전화를 했다.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내 전화도 다 적혀있을 건데 너무 섭섭합니다”고 울먹였더니 보살도 울먹이면서 “스님께서 열반에 다다라서 아무에게도 기별하지 말고 49재도 하지 말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을 하셨기에,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고 오직 자기와 상좌 수안스님만 임종을 하고 스님의 뜻에 따랐다고 한다.

 2. 스님과의 최초 인연

 내가 처음으로 스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76년(丙申年) 늦은 봄이었다. 그때는 내가 대학(현재 부산 소재 신라대학교) 전임 강사가 돼 조교수로 승진하기 위해서 연구논문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이다.

 이때는 또 나의 어머니가 회갑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내가 머물고 있던 부산 천마산 칠보사의 지장단(地藏壇)에는 지장보살의 등상만 모셔져 있고 후불탱화가 없었다.

 하기에 나는 어머니 회갑을 기념하는 뜻으로 우리 중생들의 큰 어머니를 상징하는 지장보살 탱화를 봉안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서, 그 전에 말로만 듣던 석정스님을 찾아가게 됐다.

 석정스님은 부산 금정산 기슭에 조그만 화소(畵所, 불화를 그리는 화실)에서 아주 탈속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이때 나는, 독립유공자이시고 통도사 제7대 주지를 역임하신 양대응 큰스님의 상좌이고, 월하 큰스님께 건당을 한 제자라는 것을 밝혔고, 또 나의 아버님도 통도사의 스님이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석정스님께서도 마음의 문을 여시고 자신의 유년기 금강산 시절의 얘기를 들려주셨다.

 탱화를 주문하러 가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이 서로가 다 바쁜데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저녁때가 될 때까지 많은 얘기를 나눴다.

 얘기의 주 내용은 금강산 장안사며 마하연에 관련된 옛 선사들의 행적과 선게송에 관해서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석정스님 당신이 금강산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또 그의 부친이자 은사이신, 당대 선지식으로 명망이 높았던 석두선사와, 나의 부친이자 실제상의 스승이신 금호선사께서 금강산에서 당시 눈 푸른 수좌로서 수행 정진했으니 석두선사를 모를 까닭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한 고승의 아들, 대불모 석정스님은 한 보살과 인연이 맺어져 있었고, 한 무명선객의 아들인 나 법산은 유발거사의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겉모습은 서로 다르면서도 속으로 흐르는 불연의 피가 서로 같다는 점을 무언으로 공감하게 됐던 것이라고나 할까.

 나의, 저녁 무렵 발걸음은 금정산 기슭을 걸어 내려오고 있었지만 마음은 자꾸만 석정스님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단번에 석정스님의, 진제와 속제가 잘 어우러져서 진속이제를 넘어선 보살로서의 삶을 실현하고 있는 모습에서 큰 멋을 느꼈기 때문이었을까.

 석정스님, 그는 담연한 선승이자, 불모로서의 한 경지를 이룩한 장인이었고, 선화와 선시를 자유로이 조화하는 탁월한 예술가라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게 됐다.

 이해 가을, 노오란 국화꽃이, 많은 시인 묵객을 떠올려 주던 어느 날 나는 석정스님에게 주문해 두었던 지장탱화를 찾기 위해서 금정산 기슭으로 갔다.

 스님은, 이때 내가 처음으로 갔던 화소가 아닌 그 부근에 ‘선주산방’이란 아름다운 집을 신축하고 이리로 이사를 해 있었다.

 남향으로 앉은 이 집이 수도인의 안거처 같기도 하고, 불모의 화소 같기도 하며, 또 내객의 접다실 같기도 했다. 참 맘에 드는, 그림같이 예쁜 다용도의 이 ‘선주산방’에서 스님은 나에게 달마 한 점을 그려서 찬시를 붙여 주셨다.

 나는 스님의 이 그림을, 대학의 교수로 있을 때는 연구실에 걸어 뒀다가 총장으로 재임할 때는 총장실에 걸어 두기도 했고, 또 대학을 떠나 다시 산문으로 들어와서 원효정사를 창건하고 여기 내 방을 무애실이라 이름하고 있을 때 이 방에도 붙여 뒀다가, 이제 부산 수영 원효불원 나의 방 ‘무애실’에도 이 그림을 걸어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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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진 2013-10-16 14:10:07
그림 잘그니는 스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