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설에는 세조 사건당시 남효온의 나이는 고작 3세에 불과했는데 훗날 성인이 된 그가 어떻게 똑바른 눈으로 그 당시를 기술할 수 있겠느냐며, `육신전`을 쓸 때 김문기를 빼는 실수까지 더함으로써 희대의 충신을 역사의 뒷면으로 묻어 버렸다고 하지만,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은 고려 인종 때 사람으로 어찌 삼국시대(고구려, 백제, 신라)를 알고 저술했는가 하는 반증이 된다.
1977년의 일이었다. 사육신 중에 유응부를 빼고 김문기를 넣자는 것이다. 회의 내용인 즉 김문기를 포함해서 `사육신`을 `사칠인`(死七人)이라 하는 것이 어떤가. 지금까지 여섯 명으로 알려져 온 사실을, 그리고 실록에도 명확히 적혀 있는 사실을 고치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는다.
이에 `국편위`에서도 많은 고심 끝에 `김문기가 사육신에 해당한다`는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자 1982년 기존 사육신에 김문기를 추가로 `사육신`에 현창했다.
필자는 서울 노량진역 근처 사육신(死六臣) 묘를 찾았다. `이곳은 조선 6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목숨을 바친 `사육신`을 모신 곳이다`라고 돼 있으며, 숙종 7년(1681)에 민절서원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 신도비가 세워져 오다가, 1955년 5월에 육각(6명의 뜻)의 사육신 비를 세웠다.
1978년 서울시는 의절사, 불이문, 홍살문, 비각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장으로 정화했다. 문제는 간단하다. `사육신(死六臣)의 묘라 하면, 여섯 명의 충신이 안장돼야 하는데 국편위에서 김문기를 `사육신`에 현창했다면 이 성역도 `사칠신`(死七臣)의 묘, 아니면 `사칠인`(死七人)의 묘라고 해야 되지 않나 하는 심경이었다. 최근 국사학자들은 갑론을박으로 논쟁이 끊임없는데 우선 국민이 알아야 할 충신마저 혼란이 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지방에서도 수 없는 논란이 있었다. 부산은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순절선열을 모시기 위해 동래구 안락동에 세운 충렬사(忠烈祠)도 설립 당시 동래부사 송상현과 부산진첨사 정발장군, 다대포첨사 운흥신의 후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어 지연된 점, 경남 산청군의 면화시배사적비에도 목화씨를 전래한 문씨 가문과, 그 씨를 재배한 정씨 가문 간의 이견이 있어 지연된 점, 창원 상남면 웅남초등학교 정문 앞에 필자가 쓴 논문을 표절해 애국지사의 비석을 세웠다가 깨버리고 다시 세운 점 등 후문이 많다.
뿐만 아니라 지방마다 비석을 세우게 되면 이견이 분분한데 앞으로는 당해자간에 공청회를 열어 여론을 수렴한 후 세우는 것이 역사의 본질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