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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이쾌대 작품 2점 본지서 처음 만난다
천재화가 이쾌대 작품 2점 본지서 처음 만난다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3.09.24 2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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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작품 ‘자화상’ 작품성 뛰어나 ‘진위 논란’ 일 듯
해방공간 묘사 작품 이념 갈등 보여주는 대표 걸작품
▲ 해방공간 풍경을 묘사한 작품 (1950전 후)
 올해 이쾌대(李快大) 탄생 100주년이다. 시인 백석이 1912년생이었다면 화가 이쾌대는 1913년생이기 때문. 지난 6월 29일 고향인 대구에서 이쾌대 탄생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도 열리기도 했다. 이쾌대는 ‘20세기 전반부 남북한 통틀어 최고 화가ㆍ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은 천재화가’란 수식어를 달고 있다.

 일제시대에 이쾌대는 선배격인 김관호 화백의 뒤를 이은 화가로 같은 시기에 활약을 했던 대구의 화가 이인성 그리고 이중섭과 함께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을 받았다.

 이번에 본지가 공개하는 작품 2점은 밀양에 거주하고 있는 작가 송준의 소장작품으로 한 점은 바로 한국미술계가 애타게 찾고 있던 작품이다.

▲ ‘어머니와 딸’ (1941)
 바로 1941년도 7월 6일의 작품 ‘자화상’이다. 자화상은 그동안 이쾌대가 그렸다고 소문이 난 작품이지만 그동안 실제 작품은 발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작가이면서 미술품 컬렉터이기도 한 송씨에 의해서 본지에 전격 공개가 된 것이다.

 송씨는 “부산의 노점상에서 이쾌대 작품 2점을 구입했지만 이번에 이쾌대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이 돼 공개를 하게 됐다. 앞으로 이쾌대의 진면목이 더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번에 공개하는 작품은 이쾌대의 1941년의 초상화 작품 ‘자화상’ 1점과 이쾌대의 해방공간에서의 또 다른 작품 1점이다. 크기는 각각 10호 정도의 크기의 작품인 것이다.

 송씨는 이쾌대의 전설적인 자화상에 대해 “부인할 수 없는 이쾌대의 초상화로 액자도 70년 이상이 된 것으로 진품이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통상적으로 자화상은 위작이 있을 수가 없고 또한 이쾌대의 자화상은 같은 시기에 이쾌대가 찍은 사진도 있다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진품임을 보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1948~49)
 또한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해방공간을 묘사한 작품 역시 이쾌대의 사인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혼란스러운 해방공간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한 걸작품’으로 평가를 하고 있다.

 “두 점의 작품이 공개돼 모든 국민들이 함께 천재화가 이쾌대의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고 또한 올바른 평가의 계기가 된다면 소장자로서 여한이 없습니다.”

 송씨는 백석 연구가로서도 유명하지만 미술작품을 포함한 골동품 수집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어 조만간 부산ㆍ경남에 개인박물관을 설립할 계획도 갖고 있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 자화상’ (1941)
이쾌대는 누구?

대구 출신… 6ㆍ25 때 좌익계열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
생존 위해 김일성 초상화 그려… 포로교환 때 북 선택
거제포로수용소 수용… 남한에선 경남과 인연 깊어

 이쾌대는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해 휘문고보에서 장발(張勃)의 지도를 받았으며, 재학 중인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전에 입선한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천재화가였다.

 이어 도쿄제국미술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했으며 1941년에는 이중섭(李仲燮)과 최재덕(崔載德) 등과 함께 조선신미술가협회를 조직해 서울에서 수차례 작품전을 열었다.

 8ㆍ15 광복 후에는 조선조형예술동맹 및 조선미술동맹에 간부로 가담해 진보적 미술인들의 조직을 이끌었다. 1947년을 전후해 평양에 가서 공산당 정국이 미술가들에게 혁명을 주제로 한 그림들만 그리도록 강요하는 것을 보고 실망해 돌아온 후에 좌익 노선의 조선미술동맹에서 이탈해 정치성 배제의 조선미술문화협회를 조직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이어 1949년 창설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때에는 추천작가로 참여했으나, 1950년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좌익계열인 남조선미술동맹에 가담했다. 서울에 남아있던 죄로 생존을 위해서 김일성 초상화를 그리는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어 인민군 측 종군화가로 전선에 참가하던 중 포로가 돼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돼 갈등과 고민을 하다가 결국 휴전 직후 남북 포로교환 때에 북한을 택해 가는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이후 유가족들은 남한에서 고초를 겪었으며 그런 와중에도 그의 부인은 남편 이쾌대의 작품을 다락에 숨겨놓는 지혜를 발휘해 그의 작품은 상당수 온전하게 보전이 돼 현재 그의 차남이 보관하고 있다.

 일제시대부터 주목받는 천재화가였던 이쾌대는 초기부터 인물화에 주력했으며 구도나 인물표현에 있어 단단한 해부학적 수련을 바탕으로 서양의 고전주의 기법을 이어받았다.

 8ㆍ15 광복 후에는 ‘조난(遭難)(1948)’ 등 해방 후의 어지러운 사회상을 그리기도 했으며 이번에 최초로 공개하는 작품도 그런 혼란상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이쾌대의 대표작품으로 ‘작품’(1938), ‘운명’(1938), ‘자화상(1941)’, ‘부인도’(1943), ‘탁자 위의 정물(1943)’, ‘걸인’(1948), ‘추과(秋果)(1949)’ 등이 있으나 그의 자화상이 공개가 됨으로써 이쾌대 연구에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미술계는 기대를 하고 있다.

 천재화가 이쾌대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ㆍ25 전쟁이 발발하자 한강다리가 끊어지는 바람에 결국 남하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남게 됐던 것이다. 이후 이쾌대는 살기 위해서 김일성,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등 강제 부역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유엔군의 인천상륙 직후 납치돼 다시피 북쪽으로 끌려갔던 것이고 그 와중에 국군에게 체포된 뒤 결국 북한군 포로로 오인됐고 역시 강제로 경남의 거제도까지 끌려온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쾌대의 거제생활이 시작됐다.

 이쾌대는 포로가 아니면서도 포로대우를 받으면서 1951년부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부끄럽다. 화가인 내가 인민군 포로 신세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분명한 것은 나는 북한군 포로가 아니다.”

 이 말은 1951년 2월께 거제수용소의 같은 막사에 배치된 17살의 이주영에게 한 말이다. 당시 38살이던 이쾌대는 미술에 관심이 많은 이주영을 제자로 받아들여 포로수용소에서 미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당시 이쾌대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도 인기가 있는 화가였다. 그림 실력이 탁월하다보니 포로수용소의 미군들도 그림을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거제도의 포로수용소에서의 생활은 종전이 가까워오면서 회담을 통해 포로교환이 시작되면서 끝이 났다. 이쾌대는 이 시기가 매우 혼란스러웠다고 한다. 당시 그의 막사는 좌우의 이념대결로 치닫고 수용소에서 인기가 높았던 화가 이쾌대는 엉뚱하게도 우익포로들의 표적이 됐다. 야밤에 그를 제거할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이런 식으로 좌익포로들은 우익인사를 죽였고 우익포로들은 역시 좌익인사를 죽이는 살벌한 시기였다.

 결국 우익포로들이 이쾌대를 죽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이쾌대는 어쩔 수 없이 생존하기 위해서 좌익포로 진영을 택했고 결국 북으로 갈수 밖에 없었다.

 대구의 화가였고 서울에서 활동했던 이쾌대지만 남한에서의 마지막은 이렇게 경남에서 1년 넘게 생존했던 것이다. 북을 선택한 이쾌대는 역시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고단한 인생을 살았듯이 예외는 아니었다.

 이쾌대는 대구가 배출한 화가지만 남한에서는 경남과 가장 인연이 깊은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자화상과 해방공간의 작품들이 부산에서 발견됐으니 말이다. 또한 부산ㆍ경남의 작가 송준에 의해서 그의 작품이 오롯이 보관이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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