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차 문을 열고 발을 내딛었을 때였다. 앞뒤의 그랜져에서 쏟아져 나온 사내들이 한걸음에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이런 씨발년!”
한 사내가 그녀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고 왼쪽 뺨을 맞는 수련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끌고 가.”
그녀를 질질 끌고 가며 한 사내가 내뱉었다.
“쌍년. 허벌나게 무겁네.”
백지한은 얼이 나간 듯 벽에 기댄 채 천장을 바라보고 있고, 그런 백지한을 바라보고 있는 영봉의 눈은 잔뜩 굳어 있다.
무궁사 서재 안이다. 전화를 받은 오행자의 전갈로 한 방에 모인 것이다. 방안에 침울한 정적이 한참이나 내리 깔리자 백지한의 눈이 지글지글 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나팔호에 대한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개과천선시키기에는 이미 틀린 놈이었다. 또 죽여도 하나 아깝지 않을 목숨이었다. 이윽고 백지한이 영봉을 바라보았다.
“이젠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겠지?”
“당연하지. 그 놈은 진작 응징해야 했네.”
“그래. 내가 잘못 생각했어.”
입술이 떨려 백지한은 이마를 짚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그는 그에 걸맞는 분노를 터트리고 있는 것이다.
수련의 저 처절한 진심도 헤아리지 못하고 절망의 진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그 어리석음이란……. 바보같이…….
영봉 앞에 부끄러웠고, 수련에겐 빌고싶은 마음이었다.
울상이 된 백지한이 고개를 들어 영봉을 우러러보았다.
“별일 없을까?”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택시 편으로 뭘 보낸다 했으니 일단 기다려보세.”
백지한은 다시 이마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제발 살아만 있어 다오.’
초조해진 그는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곤 새파란 불덩이를 두 눈에 담은 채 주차장으로 달려갔다. 변덕스런 날씨가 어느새 비를 뿌리고 있었다. 백지한이 다시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오전 열 한시 이십 분이었다.
‘제발 제발…….’
그는 빌었다. 택시가 오던지 전화가 오기를.
아님 아이가 직접 나타난다면…….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여 깊이 빨아들였다. 두 번, 세 번, 네 번…….
이제 그는 전처럼 그냥 있을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라도 나팔호에게 복수를 해, 자신이 그 동안 받은 고통의 만분의 일이라도 되갚아야겠다고 작심하고 있었다.
악은 그때그때 바로 응징되어야 했다.
철저히 그리고 산산이…….
‘세상이 다 말려도 내 너만은 용서치 못한다!’
나팔호에 대한 응징을 곱씹으며 몸을 한 군데 두질 못하고 그가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을 때 이윽고 멀리서 차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귀를 세웠다. 차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무궁사로 오는 차임이 분명했다. 숲길이 꺾어지는 지점에서 노란 차량이 드디어 나타났다.
‘택시다!’
그의 가슴이 더욱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가온 차에 아이는 타고 있지 않았다.
“무궁사가 여깁니꺼?”
문을 열고 나온 운전사의 손에 끈으로 겹겹이 묶은 봉투하나가 들려있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 백지한이 물었다.
“아가씬 어떻게 됐습니까?”
“아가씨라뇨?”
운전사가 저으기 경계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그 봉투를 받아야 할 사람이 바로 접니다. 전화 받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도 아가씨는 주지스님한테 드리라고 했는데…….”
운전사가 여전히 경계하며 물었다.
“거긴 스님이 아니잖소?”
시간낭비라 생각한 백지한이 대답했다.
“그래요. 스님한테 올라갑시다.”
그가 앞장섰다.
“헌데 아가씬 어떻게 됐습니까?”
“어깨들한테 끌려갔습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