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1:16 (금)
모르는 게 약은 약인데…
모르는 게 약은 약인데…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3.08.01 2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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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한열 편집국장 직대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으로 시작하는 가곡의 제목은 비목(碑木)이다. 근데 비목이 뭔가? 비목은 나무비석이다. 그러면 나무비석이란 게 있기는 한가. 6ㆍ25전쟁 때 급박한 상황에서 죽은 전우들의 시신을 돌무지무덤에 넣고 나무 십자가를 세운 것 같다. 그러면 초연은? 초연(硝煙)은 화약의 연기다. 전투가 끝난 벌판에서는 포탄이 내놓은 초연이 자욱했을 터. 아마 중학교 시절에 이 비목을 부른 것 같다. 그때 무슨 뜻인지 모르고 뭔지 슬픈 내용을 담은 가곡이라며 내질렀던 기억이 난다.

 나이 들어 사전을 찾는 수고 후에 비목, 초연의 뜻을 알았다. 이같이 나를 포함해 사람들이 막연히 알겠거니 하고 되뇌지만 실제 그 뜻을 잘 모른다는 게 현대인의 맹점이다.

 그런데 `모르는 게 약이다`란 말은 여러모로 사는데 `약`이 된다. 사실 모르고 지나가면 나중에 `그랬었나`라고 한마디 하고 나면 만사가 편하다. 내가 아는 한 분은 3주 전에 위암 절제수술을 받았다. 이 분은 50대 초반이다. 해마다 영락없이 건강검진을 받았던 이 분은 올해 건감검진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위암 초기. 의사의 말대로 일사천리로 수술대에 올랐다. 위를 3분의 2나 떼내고 며칠 전 나타났다. 얼굴은 수척했으나 나쁜 암세포를 제거했으니 이제 살았다는 감사가 말에 넘쳤다.

 한 달 만에 우리 인생이 지옥에서 천국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실제 상황을 접하고 `인생은 참 가볍다`라고 생각하면서 `뭔가 속는 것 아냐`라는 반발심이 튀어 오르는 건 뭐 때문이지. 많은 사람들은 암이라는 한 글자가 주는 두려움에 초연하긴 힘들다. 의사가 수술을 권하면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으로 가슴에 새긴다. 우리나라에서 갑상샘암을 선고받으면 종양의 크기가 작아도 수술대에 가야 할 기구한 운명이 되지만 일본에서는 1㎝가 넘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 둔다고 한다. 물론 암에 대한 정의의 차이일 수 있다.

 의사가 공포심을 주면 암 비슷한 것이 진짜 암이 된다. 이러나저러나 많은 사람들이 몰랐다면 지나쳤을 일을 알아서 큰 희생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는 건 부인하기 힘들다. 분명 "암입니다"라는 천청벽력 같은 비보도 요즘엔 "그래도 희망은 있어"라고 반응하는 사람이 많아 다행이다.

 세상에 안 변하는 게 있을까. 없다. 언젠가 세월이 흐르면 달라진다. `알아야 살아남는다`지만 `더 많이 알아 세상을 빨리 하직한다`는 말이 유효한 경우도 많다. 아마 암의 정의는 바뀌일 것이다. 암 선고를 받으면 가슴팍에 주홍글씨를 달았지만 요즘은 웬만하면 큰 어려움을 겪지 않고 툴툴 털 수 있다. 하지만 끈질기게 변하지 않는 게 있다. 다른 작은 일들은 알게 모르게 넘어갈 수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정치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열받은 사람들이 많다. 정치는 공기라 했다. 없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매일 공기 존재를 인식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리 정치는 너무 튀어 호흡 곤란을 줄 때가 많다.

 웬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정치는 고인 물처럼 늘 케케묵은 냄새가 난다. 야당이 거리정치를 시작했다. 늘상 야당의 장외투쟁은 그럴싸한 명분이 있었다. 하기야 명분 없이 나가면 그건 더 정신없는 일이고. 여하튼 이 더운 날 바깥에서 열을 내면 땀띠밖에 더 날까. 정치는 늘 그런 것이라고 모른 체하면 약이 되는데, 정치인들이 울화병을 주는데 배길 재간이 없다.

 지난달 비목을 부르는 중3 딸에게 물었다. "얘야 초연이 뭐니?" 딸은 "바람 그런 거…" 자신이 없었다. 초연의 뜻이 여러 개 있으니 헷갈릴 수도 있겠다. 초연의 바른 뜻을 알아서 비목을 부를 때 더 가사를 이해하길 바라면서, 세상에는 모르고 지내면 휠씬 좋은 일들이 많다고 일러주고 싶었다. 하지만 중3 딸이 이 말을 깨달아 세상을 삐딱한 눈으로 볼까 걱정이 돼 차마 입을 못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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