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6:37 (화)
아이야, 너희들은 나비일레라
아이야, 너희들은 나비일레라
  • 김루어
  • 승인 2013.07.25 21:20
  •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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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루어 시인
 매미가 울기 시작했다. 계절에 순서가 있듯 여름에도 순서가 있다. 매미가 운다는 것은 한여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날씨는 더욱 극성스러워졌다. 염천(炎天). 숨막힐듯한 더위다. 집안에,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땀이 비 오듯 한다. 이런 더위에는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생각을 모을 수가 없는 탓이다. 다시 에어컨을 켠다. 절전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날씨에도 일해야만 하는 이들에게 죄스러운 느낌이 들어, 껐다가는 한 시간이 채 못 되어 다시 켜고 만다, 지금처럼.
 일어서 창밖을 내다본다. 거리는 비어있다시피 하다. 가끔 보이는 행인들도 양산을 쓰고 걷거나 그늘을 따라 걷는다. 도심에 열기가 가득 차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차량들이, 건물들이 열기에 헉헉댄다. 열기가 모든 사물들의 무게보다 더 무겁다. 하지만 열기는 사람들이 무거워 한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그 열기에서 달아나고 싶다. 여름자체가 열기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들로, 산으로, 바다로 달아난다. 거기에는, 다른 여름이 있다.
 나도 그들처럼 이 열기 가득한 도시에서 달아나고 싶다. 아니, 그들과 함께 달아난다, 기억의 회로를 따라서나마. 나는 들로, 산으로 가는 사람들 속에 섞인다. 그들과 함께 버스를, 기차를, 승용차를 탄다. 그들은 대개가 하나 혹은 둘쯤, 방학을 한 아이들을 동반하고 있다. 아마, 아이들에게 다른 여름을 보여 주고 싶어서 이리라. 나도 이때는 아이다. 창밖으로 들이 흐른다, 푸릇푸릇 모가 올라오는 푸른 들이. 그 들 가운데 드문드문, 밀짚모자를 쓴 농부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김을 매고 있다. 차량들은 빠른 속도로 그들을 밀어내고 달린다.
 멀리 높은 산이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량은 산그늘 끝자락에 멈춘다. 강을 낀 농촌마을이다. 장전된 총알처럼, 아이들이 먼저 튀어 나간다. 연고가 있는 이들은 마을로 들어가고, 연고가 없는 이들은 야영 장비를 메고 산자락에 있는 야영장으로 향한다. 나는 마을로 들어간다; 농촌 출신이기 때문이다. 날은 아직 해거름전이다. 높은 산 끝자락 저만큼 야트막한 산을 등지고 옆으로는 내가 흐르는 칠십호쯤으로 어림되는 마을로 향한다. 아이들을 앞세운 일행은 마을 고샅길로 접어든다. 그 길 끝 정자나무 아래,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가 서 있다.
 아이들이 소리치며 할머니에게 달려가 양쪽 팔에 매달린다. 할머니가 잠깐 몸을 휘청하지만 주름진 얼굴에는 미소 그득하다, 마냥 저녁햇살 같은. 일행은 할머니를 옹위하고 마을 안 돌담길을 따라가다 어느 양철대문을 밀고 들어간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마당거적에 널어놓은 보리를 뒤집던 노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일행을 보는 노인의 그윽한 눈매. 마루에 올라 일행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큰절을 채 마치기도 전에 대문간이 시끄러워졌다. 그네들이 왔다는 소식을 그새 들었는지, 일가친척들이 하나 둘 셋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달이 떴다, 멍석을 깐 마당 위 푸른 여름 저녁하늘 위로. 분주하던 정주간에서 저녁상이 나왔다. 하지만, 일가친척들이 둘러앉은 두루거리 상마다에는 달보다 환한 이야기꽃이 여전하다. 아이들은 신기하다, 밥과 찬이. 놋그릇을 채우고 올라온, 반이 보리인, 콩이 섞인 고봉밥이. 날된장과 풋고추가. 호박나물과 가지김치, 감자부침개가.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나물반찬들이. 저녁을 먹고 나자 아이들은 혀가 얼얼하고 코가 빨개졌다. 모기가 극성을 부렸다. 할아버지가 마당 한 켠 다북쑥더미에 불을 붙였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찔렀다.
 일가친척들이 돌아간 자리에 개구리 울음이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아이들은 양손 깎지 하여 베개하고 반듯이 누웠다. 푸른 달과 손톱처럼 은은한 별이 하늘에 총총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눈은 곧 달님이나 별님보다 가까이 있는, 헛간 지붕 위, 눈이 시리도록 하얗게 핀 박꽃에 이끌렸다. 눈물이 날만큼 애처로운, 애처로워서 아름다운 박꽃에. 이런 느낌이 아이들만의 것은 아니었는지, 혹은 서로의 애처로움을 위로 하고자였는지 박꽃주위로 반딧불이 날아왔다, 벼꽃 같은 반딧불이. 어쩌면, 다북쑥 모기향이 사위여 져서였는지도 모르지만.
 반딧불의 박꽃 위로무(慰勞舞)를 보다가 마당 멍석위에서 잠이 들었다, 아이들은.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안방이었다. 농촌의 아침은 바쁘다. 아침을 먹고 들로 나가는 어른들을 따라가려는 아이들을, 어른들이 꾸짖어 주저앉힌다. 아이들은 마당 화단 앞에서 채송화, 접시꽃, 맨드라미, 장다리꽃, 봉선화꽃잎에 심술을 부리다가, 그것도 재미가 없어지자 마루에 앉아 무료히 돌확에 앉은 잠자리를 심드렁한 눈길로 보다, 문득, 곤충채집을 해 오라는 방학숙제를 생각해내고는 포충망을 들고 들로 나선다.
 들 저만치, 논과 밭에, 밀짚모자를 쓴 어른들이 허리를 구부리고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어른들 눈이 닿지 않는 들 끝자락 숲으로 간다. 숲에는 매미소리 가득하다. 거기서, 그들은 포충망을 휘두르며 철써기, 여치, 사마귀, 사슴벌레, 풀무치, 방아깨비를 쫓아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것들은 아이들에게 신기한 꿈 혹은 꽃과 같다, 말로만 듣던 혹은 책에서만 보던. 이윽고 아이들의 상기된 얼굴에, 코에, 이마에 뽀송뽀송 땀이 맺힌다. 하지만, 아이들은 여전히 이리 뛰고 저리 뛴다. 그 아이들이 나비 같다, 꽃을 찾는. 혹은 꿈을 쫓는. 아아! 그래, 아이야! 이 여름에, 너희들은 꽃을 찾는 혹은 꿈을 쫓는 나비일레라. 나 또한, 우리 또한 래생(來生)에는 나비일러니!

 * 더 좋은 글로 다른 기회에 찾아뵐 것을 기약하며 김루어 칼럼은 이번회로 마감합니다. 그동안 과분하리만큼 성원하고 격려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더운 여름, 건강에 항상 유념하시고 가내 늘 평온 다복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김루어 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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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윤 2013-08-02 11:28:06
여름의 서정으로 오늘 글이 끝이 아닌 채 충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동안 좋은 글 많이 담고 새겼습니다.
다시금 지면으로 뵙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이상돈 2013-08-01 11:39:57
살아 가면서 좋은 글을 접하게 된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아쉬움을 전하면서.

자스민 2013-07-29 18:57:54
이렇게 좋은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늘 행복하였습니다.
다시 연재하실 수는 없나요. 욕심인줄 알지만 아쉬움만 남습니다.
계속 읽을 수 있는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임종관 2013-07-28 09:23:47
참으로 차분하면서도 감성적인 주옥 같은 글들 이였습니다
읽고나면 두고두고 여운이 남았던....

다른 지면으로나 다음에 계속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어서 오길 기다리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이현준 2013-07-27 00:25:41
한주만에 만나는 이 글들을 다시 볼 수가 없다는 것은 절대로 안된다는 생각이다. 해서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끝나면 이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래본다.숱하게 변화하는 우리들 일상들에서 한주간에 한번이라도 우리를 일깨우는 시간을 주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 김시인님, 고맙습니다. 충전하시고 다시 뵙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