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am I ?
Who am I ?
  • 김루어
  • 승인 2013.07.18 22:28
  •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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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루어
 현실에 끄달릴 때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혹은 그 이상, 내가 왜 이렇게 고통을 당하지? 정말이지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을 것 같다. 이때의 ‘나’는 현실의 나와 같을 수도 있고 다른 나일 수도 있다. 나 또한 ‘누구나’에서 비켜나 있는 인간은 못되어서 현실에 끄달릴 때마다, 특히, 근자 두 달 가까이 누군가의 표적이 된 이래로는 더욱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상주바닷가에 다녀온 뒤 손위 고종의 부음을 받게 되었다. 손위라 하나 고종이면 동항. 소멸이 결코 나와 천리만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경고까지 받은 셈이다.
 늦된 탓인지 스물이 될 때까지 나는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 탐욕스레 책만 읽는, 현실적응력이 모자라는 덜떨어진 청춘이었을 뿐.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뇌리에 각인된 것도 책이 매개였다. 새벽에 일착으로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는, 영작능력을 높이기 위해 원서와 번역본을 같이 두고, 번역본을 보고 원문을 보는 순으로 세익스피어를 읽던 시절에, 리어왕을 읽어 가다 눈에 들어온 번역문 하나가 어딘가 좀, 앞뒤 문맥으로 보아 맥락이 닿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원문을 확인했다: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
 독자들께서는 이미 아셨겠지만 번역문은 원문의 뜻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오역은 30년 이상 지난 지금도 인터넷과 일부출판사 번역본에 건재하고 있다. 그러나, Who am I? 라는 질문은 내 삶의 화두가 되어 버렸다. 환경변화로 대학을 더 다니지 못하게 된 나는, 잠을 줄여가며 맹렬히 책을 읽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답변을 책에서 찾고자. 대학생이었던 나와 사회인인 나는 동일한가? 동일하다면, 대학생일 때 꿈꾸었던 미래의 나는 사회인인 나로서 성취 가능한 나인가? 동일하지 않다면, 그래서 성취가능하지 않다면, 나는 다른 꿈을 꾸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존 로크와 데이비드 흄이 슬며시 내 앞에 실마리를 늘어뜨렸다.
 로크는 변화가 있더라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가 동일하다는 의식이 있으면 양쪽 ‘나’는 동일하다고 간단히 답변했다. 명성에 비해서는 일일이 반론할 필요조차 못 느낄 만큼 허술한 답변이었다. 흄이 내미는 실마리를 당겼다. 흄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존재라고 단언했다. 나는 로크의 논리를 빌어 반문했다: 그런데, 왜 우리 의식은 양쪽 ‘나’를 동일하게 느끼지요? 흄이 느욱하게 말했다. 그 이유는 양쪽 ‘나’가 인접해있고 모습이 유사하고 행동에 인과성이 있기 때문이지. 하지만 이 세 성질이 양쪽 ‘나’의 동일함을 담보할 수 있을까?
 흄의 답변이 반드시 현상에 정합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비정합을 일반화된 질문으로 만들어 내기에는 내 논리와 지성이 미치지 못했다; 그의 논리는 로크보다 훨씬 정교하고 교활하기까지 해서 지각들의 다발이라는 개념까지 접맥시키면 이현령비현령의 여지마저 있어 보였다. 그런데, 세월은 사람을 마모시키기도 하지만 성장시키기도 하는지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흄의 논리가 시간의 비가역성을 동일성 문제로 전환하여 존재론의 난제들을 풀어 보고자 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시간속의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문제였다.
 시간은 종교와 수학이나 물리학의 영역이었다. 후자들은 내 능력으로는 언감생심의 영역이었다. 그에 반해 종교는 그보다 수월해보였다, 이게 착각임은 오랜 세월 뒤에 알았지만. 하지만, 십년이상 교회에 다녔다. 그러면서 틈틈이 유클리드기하학과 비유클리드기하학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과학철학과 물리학 서적들을 읽었다, 물론 내 이해 능력범위 안에서였겠지만. 사십대에 접어든 어느 날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교리가 싫어서가 아니라, 종교적입장과 학문적입장의 차이ㅡ나는 알고 믿고 싶다였고 교회에서는 믿게 되면 안다는 순서의 충돌 때문이었다.
 요컨데, 나는 종교적인간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쩌면, 리만 기하학의 영향으로 인한 직선적시간관에 대한 회의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 더하여,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반복 혹은 순환에 대한 목도의 높아진 빈도도 일정 역할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런 반복 혹은 순환은 때로 나로 하여금 연기론으로 기울게 만들어 인연 혹은 윤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순환적 시간관에 동의하는 것만도 아니다. 설령 순환적 시간관이 옳다 하더라도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순환의 연쇄를 입증하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불가능이 인간 세상에 종교를 가능하게 하는 기반의 하나가 되었을 터이다. 그리하여 증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도그마가 모든 종교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당연한 귀결일 게다. 왜냐하면, 유한이 무한을 말한다는 자체가 도그마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 지적 편력의 결과로는, 시간속의 인간은 소멸 아니면 순환이다. 키에르케고르의 표현을 빌자면, 결국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로 축약될 수 있겠지만 그 차이는 천당과 지옥의 차이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현재의 나는 순환적 시간관에 기울어 있다. 연기론이 아니면 현실에 끄달리는 나를, 우리를, 인간을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들은 누구인가? 끊임없이 현실에 끄달리고 세월에 바래는 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답변해줄 수 있는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나는 누구인가? 하지만 나는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을 이렇게 번역한다: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나 아닌)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타자인, 누구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왜냐하면, 연기론에 따르면, 현재의 나는 내가, 당신이, 우리들이 만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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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 2013-07-26 15:58:25
원래는 Is it who that~ 이하가 되어야 겠지만, 이때 it은 가주어 이고 부가의문문인관계로 Who가 앞으로 나간거지요. 실제 리어왕 원문에도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루어 2013-07-26 15:57:17
쥬스님, 댓글을 늦게 봤습니다. 문제제기에 답변을 드립니다.일반부가 의문문인 경우는 쥬스님 지적이 맞습니다. 그런데, 영어에는 강조구문이라는게 있지요. 강조구문중 하나에 IT be A that B. 문형이 있습니다. A자리에 강조하고자 하는 말이 오지요. 이 문장에서는 Who를 강조하고자 하니까 A자리에 Who가 와야 겠지요. 이를 강조구문에 적용하면 Who is it that can tell me who I am?이 됩니다.

포도쥬스 2013-07-26 13:12:45
내가 누구인지 나에게 누가 말해줄 수 있단 말인가?
가 될려면,
Who can tell (me) who I am? 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요.

이서윤 2013-07-21 10:31:01
몇 달전 본 영화 레미제라블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Who am I?'
글을 읽어보며 공감하면서도
아직도 못 푼 숙제입니다
저를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으면서도
사실 아직 잘 모르거든요
40대가 지나면 그땐 깨달아질런지
두고 생각해 숙제인 것 같습니다

이현준 2013-07-19 22:23:25
내가 나를 만들었고, 당신이 나를 만들고 우리들이 나라는 개체, 존재를 만든다는 말은
참으로 깊은 사유속에서만 나올수 있는 말입니다.
또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헤매는것은 당연하다는...
나는 누구인가? 와 내가 누구인가? 라는 질문도 번갈아가며 자신에게 던져 봅니다.
이열치열이라는 말이 딱 맞습니다. 이 염천에 시인님의 땀흘리심에 놀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