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19 18:17 (화)
바로, 이 맛이야!
바로, 이 맛이야!
  • 김루어
  • 승인 2013.06.25 22:58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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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루어
 한 달 만에 깁스를 풀었다, 발목을 접지른지.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족쇄에서 풀린 듯. 하지만, 마음만 그럴 뿐 걸음은 아직도 어색했다. 쉬지 않고 걸음걸이를 연습했다,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한 달 가까이 집에만 갇혀 있었더니, 좀이 쑤셔 어디로든 나가보고 싶었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그때 구원처럼, 우포에서 농사를 짓는 문우 A로부터 안부전화가 왔다. 걸을만하다는 내 말에 그네는, 우리 내일 감자 캔다우. 언니도 사정이 허락하면 바람 쐴 겸 놀러 오슈, 경남 쪽 문우들이 대부분 오겠다고 하우, 하고 말했다.
 약속한 일요일 새벽에, 가까운 엠시에 사는 문우가 운전을 못하는 나를 태우러 왔다. 그런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곧 비라도 내릴 듯 하늘이 흐려져 마음이 무거웠다. 여름 일손이 바쁠 때 최소 한 번은 A네 농장 일손을 덜어 주기로 문우들 간에 묵계가 되어 있었는데, 나는 그때마다 이런 저런 사정으로 제대로 이행한 적이 없다시피 했던 것이다. 살구나무로 둘러싸인 농장에 도착했을 때는 7시 조금 넘었을 뿐이었지만 우리가 가장 늦었다. 남녀문우들이 벌써 작업복차림으로 손에 호미 한 자루씩 들고 비닐하우스 거처(居處)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A부부와 문우들과 인사를 나누고 비닐하우스 안 거처(居處)에서 작업복으로 갈아입었다. 문우들이 둘 셋씩 조를 짜 비닐하우스 동과 동(棟) 사이 노지(露地)에 있는 감자 밭고랑 하나씩 맡아 밭으로 들어갔다. 호미를 들고 편성된 조원을 따라 가는 나를 A가 소매를 잡고 말렸다, 발이 온전치 못하니 하우스 안에서 고추를 따라고. 그럴 수는 없다는 내게 그네는 강제적이다시피 하우스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는, 고추 따는 것도 언니한테는 쉽지만은 않을거유, 하고 그네는 나에게 허리에 자루를 둘러 주었다. 도리 없이 고추를 따는 수밖에 없었다.
 그네 말처럼 고추를 따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500평이나 되는 하우스 안에 A네 주작물인, 끝없이 줄이어선 반쯤 자란 자짓빛 가지를 단, 마지막 수확을 앞둔, 내 키보다 큰 가지나무 그루가 내뿜는 열기가 요즘 아이들 말로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고추는 그 이랑사이 사이에 가지나무에 영향을 주지 않을 정도로 심어져 있었다. 그 외에도 오이나 상치, 쑥갓 같은 채소도 있었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정말 오래간만에 흘리는 노동의 땀! 문득 성장기를 보낸 농촌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되었다, 30년도 더 이전의 세월로.
 감자 캐기는 오후 다섯 시 쯤에 끝났다. 나는 고추를 세 자루쯤 땄다. 지치고 땀에 젖은 몸으로 고추자루를 끌고 거처로 나오니 모두들 땀투성이 진흙투성이였다. 얼마간 젖어 있기도 했다. 안에서 일한 나는 제대로 몰랐지만, 밖에는 그 동안 보슬비가 오락가락했던 모양이었다. 점심 전에는 하늘이 흐릴 뿐 비가 내리지는 않았었다. 농장 앞 개울에서 손발을 씻고 모두들 거처 방안 큰 상에 둘러앉았다. 점심때 제대로 못한 술판이 벌어졌다. A부부가 질 좋은 고기를 구워내 안주가 풍성했지만, 술잔이 몇 순배 돌기도 전에 대개가 드러누워 버렸다.
 하루도 채 안되게 노동하고 그게 뭐람! 하고 누군가 타박을 주었지만, 드러누운 이들은 한결같이, 농삿일이 이렇게 힘들 줄 누가 알았남! 할뿐 일어나진 않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드러누운 이들 대부분이 손에 흙 한 번 묻혀 본적 없는 도시인들이었던 것이다. 누군가가, 우리가 캔 햇감자 맛 좀 보자, 고했다. 좋은 제안이라며 A가 감자를 삶아왔다. 그런데, 감자를 삶아 와도 집는 이는 두어 명일 뿐 모두들 그대로 누워 있었다. 피곤할 때는 고기맛도 별로인데, 감자가 별맛이겠냐는 듯. 하지만, A부부는 문우들에게 일일이 삶은 햇감자를 돌렸다.
 바로 이 맛이야! 가장 먼저 감자를 먹은 이가 탄성을 질렀다. 그랬다. 감자 맛은 탄성이 날만큼 좋았다. 도시에서 산 감자 맛과는 전혀 다른, 상큼하고 신선하고 여리어 달콤하기까지 한 감자 맛! 몇 사람의 연이은 탄성에, 누웠던 이들이 부스스한 눈으로 일어나 별일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받은 감자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는 어! 하는 표정들이 되더니 동시다발로 외쳤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제일 먼저 감자를 먹은 이가 짓궂게 물었다. 이 맛이 뭔데? 가장 늦게 감자를 입에 넣은 이가 대답했다. 내가 흘린 땀의 맛! 와그르르한 웃음이 거처에 낭자하게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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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호 2013-07-05 21:02:17
제가 감자를 쪄먹기 시작한것은 30대 초반 먼 타국에서 였습니다..
그곳의 감자는 아주 작고 쫀득한 맛을 지녔지요..
이후 한국에서 감자를 쪄먹기 시작한것은 불과 4~5년전부터 이구요..
그 동기는 지난날 타국의 감자맛이 그리워서 쪄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속까지 데워주는 그 뜨거운 맛을 잊지못해 찾곤합니다..
감자의 영양성분이 얼마나인지는 모르지만 찝찌름하고 뜨거운 그맛은
빛은 가슴이지만 소금과도 같은 맛이 아닐까,

강대선 2013-06-26 15:13:44
노동의 기쁨..
땀의 기쁨이 가득한 만남이셨군요..
땀이 비오듯 흐르는 농삿일
쉬운 일은 아니지요.
이 세상 무엇하나 소중하지 않은 일이 없다고 하지만
농삿일만큼 진실된 노동과 수확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 감자를 쪄서 먹었는데..
하, 정말 그렇게 맛있어도 되는지..
우리네 삶이 그렇게 맛깔났으면 좋겠습니다..

이현준 2013-06-26 12:00:30
깁스를 푸셨다니 축하합니다. 시인께서 오랫만에 아주 잼나고 가벼운 이야기를 풀어 놓으셨군요.날아 갈것 같은 기분이라 하셨나요? 그 또한 좋은 맛일거라는...한달동안의 그 불편함이, 거동이 불편하니 매사가 다 불편함 덩어리였을 것인데 일단 푸셨으니...몸이 불편하면 글도 무겁잖아요? 시인님의 글이 중앙무대에서도 함 크게 필명을 떨피시고 청량감을 더해 줄 수 있다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이현준 2013-06-26 11:52:42
이웃과 조금씩 나눠 먹는 재미도 솔솔하고 금새 딴 풋고추랑, 쌈재료들로 먹는 식사는 정말 꿀맛이다. 어쩌다 밖에서 쌈을 먹게 되면 그 맛이 확연히 다름을 알게 된다. 해가 뜨기전에 일을 시작했지만 끝날때면 해가 중천에...범벅이 된 옷이란...바로 샤워기로 몸을 씻어내면 그 시원함이란...수확한 것들을 먹는 꿀맛도, 노동 후에 물을 끼얹는 그 청량감...이 또한 내가 흘린 땀의 맛이리라.

이현준 2013-06-26 11:47:21
도회에서 농사일을 한다는 것이 그리 흔치는 않지만 좁은 집 울타리안에 텃밭은 만들고, 옥상에 큰 화분에 흙을 담아 줄지어 놓고 갖가지 채소나 야채를 심는 가정이 많다. 나는 시골에서 상경한지가 45년이나 지났지만 대부분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어 텃밭 가꾸는데 이력이 났다. 연전에는 집 담벼락 옆에 밭을 일구어 배추도 60포기, 무우 90포기, 가지도, 상추, 고추도 심고 갖가지 쌈채소를 심어 가꿔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