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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사냥
장마사냥
  • 김루어
  • 승인 2013.06.18 22:47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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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루어

 장마가 시작되었다. 평년보다 1주 이상 빠르고, 또 평년과는 달리 중부지방에서 시작되는 거꾸로 장마라 한다. 이런 특이성에도 불구하고, 장마를 반기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 연평균 강우량의 50%가 내릴 만큼 호우가 편중되어 커다란 피해를 불러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기간에 태풍이라도 가세하면, 그 피해는 수치로 나타나는 인명과 재산피해 이상의, 치유하기 어려운 상흔을 남기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과학의 발달과 정책대응으로 피해를 전보다 줄이거나 최소화할 수 있게 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장마가 반갑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생활의 불편이다. 이 기간 동안 천둥번개가 자주 발생하고 궂은 날이 많아 일상이 불편해진다. 또한 높은 기온과 다습한 날씨는 일의 능률을 떨어뜨리고 신체리듬에 영향을 미쳐 건강을 위협하기 쉽다. 이런 불편과 비능률,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적절한 장마사냥을 할 필요가 있다. 사냥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나는 독서를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직장인이든 아니든 간에 날씨 때문에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 독서할 시간을 내기가, 독서의 계절이라는 가을보다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이다.
 하지만, 독서시간을 내기는 나을지 몰라도 장마기간 독서조건이 가을이나 겨울독서보다 불리한 점도 있다. 전공서적이나 깊이 있는 책을 읽기에는 아무래도 날씨가 부담이 되는 것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장마기간엔 대하소설 특히 대하역사소설을 많이 읽는다. 그 이유는 스토리가 자극적이고 전개가 다이나믹하기 때문이다. 더 큰 이유는 옹색한 미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인 내게, 거시적인 삶을 거침없이 살다간 이들의 웅혼한 영웅적 삶의 행적이 내게 일정한 대리만족을 주어 내 정신을 카타르시스 시키기 때문이다.
 만약 나와 같은 독서취향이 있는 분들에게 대하역사소설을 추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다음 작품들을 추천하고 싶다. 박종화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 홍명희의 임꺽정, 황석영의 장길산,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 김주영의 객주 등. 내가 이들을 드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내 주관적인 선호가 작용한 바가 없지는 않겠지만, 문학사에서 어느 정도 평가가 내려진 작품들이어서, 퓨전사극이라는 호도아래 티브이에 횡행하는 엉터리 사극들과는 변별이 될 것 같아서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도 한계나 흠이 없는 것은 아니어서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필요는 당연히 있다.
 박종화는 평가가 엇갈리는 작가다. 그 이유는 자기가 산 시대에 임한 처신 때문인데, 여기서는 작품, 특히, 역사소설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다. 그의 소설은 그가 설정한 주인공을 자신의 역사관의 아바타로 만들어 그 시대를 재단하는 심판관으로 삼는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자고 가는 저 구름아, 의 송강 정철이다. 그는, 사가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어느 정도 완료된, 정철을 판관으로 만들어 당대와 당대 인물들을 선악으로 이분하여 재단하는 만용을 감행한다. 하지만, 역사소설을 대중화한 공로와 그 시대 제도와 기구에 대한 리얼리티는 인정할만하다.
 홍명희의 임꺽정은 미완작이다. 비판보다 칭찬을 많이 받는 작품인데, 나는 세 번 읽었는데도 눈에 차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수호전의 문법을 그대로 따라서이다. 당연히 수호전을 넘지 못했다. 수호전에는 최소한 근왕(勤王)이라는 명분이나마 있었지만, 임꺽정에는 어떤 대안이나 비전도 없었다. 단지, 기성체제에 저항하는 일탈자들의 무력조직. 그 조직을 장악하기 위한 폭력, 그리고 조직을 유지하는 일인의 전제. 북한 김씨 왕조가 체제유지 기법을 이 작품에서 배운 바 있다는 느낌. 그런데도 내가 이 책을 세 번 읽은 이유는 이 작품 안에 든 풍성한 순 우리말 때문이었다.
 황석영의 장길산은 여고 때, 연재 첫해 앞부분을 신문에서 우연히 읽었다: 길산의 어미가 회임한 채 쫓기다 죽을 사먹고 엽전 한 닢 내는 장면. 숙종실록에 장길산이 등장하는 것은 1692년, 1697년 2건. 실록에 등장할 정도의 조직을 이끈 도적이면 최소 서른 이상 이었을 것. 그러면 어미 뱃속에 있을 때는 1670년 이전이었을 터. 엽전 상평통보가 만들어진 게 1678년. 대중에 통용된 것은 이보다 훨씬 뒤. 황석영의 이런 황당한 무식 용감은 송도상인 집단의 활동, 광산개발, 잠채, 인삼 무역 등등의 설정으로 이어진다. 이런 경제활동은 모두 그보다 반세기 혹은 일세기 뒤의 일들. 이 소설의 장점과 성취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문학평론가들은 왜 이런 황당함들을 지적하지 않는지……
 이병주의 바람과 구름과 비는 그 리얼리티가 임꺽정이나 장길산보다 떨어진다. 그러나 유교가 지배 이데올로기인 조선시대 지식인들의 교양과 시대에 대한 해석이 돋보이는 장점이 있다. 김주영의 객주는 미완작, 아니, 현재 모 신문에 아직 연재가 진행 중인 작품이다. 9권까지 읽었을 때 리얼리티에 바탕한 질감이 현재화되는 공명을 느꼈지만, 유감스럽게도 시대에 대한 설정의 용융은 미진한 느낌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보부상들이 일진회에 이용당하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이 궁금했다. 하지만 아직 진행 중이기에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장마사냥이 아니라 무명 칼럼니스트가 짧은 글로, 한 세대 혹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역사소설을 사냥해버린 것 같은 죄스러움이 없진 않으나, 상기 작품들이 이룬 성취는 이미 기성 평론가나 언론 혹은 출판사들이 충분히 나열 하였기에, 그네들이 지적하지 않은 흠을 감히 짚어 보았다. 그 이유는, 만일 이런 신랄한 비판과 독자들이 깨어 있는 자세로 독서하지 않는다면, 사극이라는 이름으로 티브이나 영화에 방영되거나 상연되는, 너무나 황당한 퓨전사극들의 내용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듯 대중, 특히 청소년 계층을 오염시키는 중우화(衆愚化)가 순문학에도 범람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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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 2013-06-21 15:05:47
비가 이틀 내리더니 낮엔 한여름의 볕을,
밤에 서늘함을,
습기만 없다면 사막일까 착각이 될 듯한 날씨입니다.
여름의 이른 기습에 책사냥 좋겠어요.
전 아마 세계 대표 작가들의 책을 봐내야할 것 같습니다.
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고 다음의 글 기대하겠습니다 ^^

이현준 2013-06-20 23:55:51
전기료도 문제지만 에어컨은 생각도 못하고 선풍기는 또 종이가 날리니 그 또한 적절치 못하니...글씨작업을 하는 내겐 장마사냥법이 막연하다.선풍기를 역방향으로 틀어놓고 작업을 하기도 하지만 눅눅한 실내인지라 썩 맘에 들지 않은게 현실이다. 금년에는 그래도 에어컨을 좀 사용해 보리라 생각했는데 온 나라가 전력사용에 비상이 걸렸으니...또 다른 나의 장마사냥을 걱정해 본다.

이현준 2013-06-20 23:49:23
시인께서는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장마를 어떻게 사냥하여야 하는 매우 친절하고도 용의주도하게 그 방법을 일러 주셨군요. ㅎㅎㅎ요즈음 책을 읽는 시간은 갖지 못하지만 하는 일이 붓글씨를 쓰는 일이라 정말 이 일에 잘 맞는 사냥법은 없을까요? 얼마전 작품을 부탁받아 운필을 하려는데 종이도 눅눅해지고 붓이 잘 나가지 않아 아주 애를 먹었답니다. 종이가 눅눅하니 먹색도 산뜻하지를 못하고 버짐도 많아지고...

강대선 2013-06-20 10:24:45
사냥이랴..
대하소설..
대학시절에는 태백산맥..토지..장길산...혼불..아리랑..
이런 류가 대세였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완독하는 것은 아니고..
재미있는 부분만 골라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장마.. 사냥을 하면서 보낼 수 있을지..
하지만 생각으로도 카타르시스가 되는 아침입니다..
좋은 사냥감을 선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인님

2013-06-19 09:13:19
간밤 내내 천둥과 번개로 잠 못 이루는 까아만 시간들이었습니다.
키 높이 파도는 넘실거리고, 그러다가는 이내 잔잔하게 일렁입니다.
장맛비는 조금 사나워서 싫습니다. 시인님께서 이렇게 사냥을(?)해주신 덕분에
저는 이병주님의 <바람과 구름과 비>를 이번장마에 뇌리에 새겨둘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시인님, 쾌차하셔요.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