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포늪 근처에서 농사를 짓는 가까운 문우 한 분이 올해 농사 첫 수확이라며 살구 한 상자를 보내 왔다. 지난겨울 자료조사차 도동서원(道東書院)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네 농장에 들렀더니, 비닐하우스 울타리 역할을 하는 살구나무가 나목이었지만 하 튼실하기에, 살구가 익거든 맛 좀 보여주세요, 라고 한 말을 잊지 않고 보내 온 것이다.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생각 없이 한 내 언사(言辭)가 후회스러웠다. 그네가 귀농하여 20년 이상 농사를 짓는 동안 일손 한 번 제대로 거들어준 적도 없으면서 냉큼 이런 선물을 받는 것이 면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윽하게 등황색으로 익은 살구를 앞에 놓고 보니, 그런 염치(廉恥)는 그새 어디로 달아났는지 입안에 신 침이 괴었다. 살구를 물에 깨끗하게 씻어 입에 한 개 넣고 깨물었다. 순간, 과육의 달콤한 감미와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이어지는 신맛! 나도 모르게 상이 찡그려졌지만 씨는 뱉어내고, 다시 한 개 더 입에 넣었다. 몇 년 만에 맛보는 살구의 신맛이었다. 살구를 좋아하지만, 초여름에 잠시 나는 과일인지라, 마트에 갈 때 유념하지 않아 못 보고 지나가는 해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살구 맛은 내 고향, 내 성장기의 맛 그대로였다.
나는 살구를 좋아한다. 어쩌면, 성장기를 보낸 농촌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뿐만 아니라 70년대, 아니 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에는 살구나무가 흔했던 것 같다. 고향마을도 그랬다. 집집마다 살구나무 한 그루쯤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살구나무 외에도 앵두나무, 배나무, 감나무 같은 과수도 있었지만 단연 사랑을 받는 과수는 살구나무였다. 꽃 때문이었다. 살구나무는 다른 과수보다 꽃이 일찍 핀다. 게다가 화사하기 짝이 없다. 꽃이 만개했을 때 멀리서 보면, 초가집이 옹기종기한 마을이 마치 꽃 대궐 같았다.
그러나 모든 절정이 그렇듯이, 살구꽃의 절정 또한 짧기 그지없다. 꽃이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는 법. 살구꽃은 사월 중순쯤이면 벌써 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꽃구경은 가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꽃 질 때는 눈을 돌린다. 안쓰러워서 일터이다. 그러나 살구꽃은 만개할 때 못지않게 꽃 질 때 또한 장관이다. 특히, 보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이 여위어 가는 저녁 무렵에 지는 살구꽃은 말 그대로 꽃비에 다름 아니었다. 성장기, 어느 봄에 우산도 쓰지 않고 동무와 함께 꽃비를 그대로 맞으며 살구나무 밑에 하염없이 서 있던 기억이 불현듯 새록하다.
꽃이 지고 나면 아기 손톱만 하던 푸른 열매들이 깊어가는 봄날과 함께 눈에 띄게 짙어지고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살구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습관처럼 아직 익지도 않은 푸른 살구 알을 따서 입에 넣고 깨물다가는, 살구의 독특한 신맛 때문에 오만상을 찡그리며 퉤, 하고 뱉어버리고는 했다. 저놈의 살구는 언제쯤 익나 하는 눈길로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며 날을 헤는 아이도 있었다. 춘궁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군것질 거리가 귀하던 당시에는 봄철 과수에서 열리는 살구나 앵두 같은 철 이른 과일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만만한 주전부리였던 것이다.
유월이 짙어갈 무렵이면, 우리는 주머니에 가득 살구를 넣어 다녔다. 그러나 여자 아이들은 중학생쯤 되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 동무 몇 몇은 여중을 졸업할 때까지, 유월에는 살구를 치마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다녔다. 당시 농민들 살림살이가 일반적으로 어려웠지만,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가정의 동무들이 그랬던 것 같다. 살구나무 아래서 꽃비를 함께 맞던 동무도 그 중 하나다. 유월에는 그 동무들에게서 살구냄새가 났다. 아마, 내게도 살구냄새가 났을 것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나도 주머니에 살구 몇 개는 넣어 다녔던 것이다.
살구냄새. 나는 살구냄새가 좋았다. 특히 살구의 신맛이 좋았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상식(常食)하는 과일 대부분이 오미(五味) 가운데 단맛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반해, 살구는 드물게 강한 신맛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구냄새가 나던 동무들은 대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진학하지 못했다. 꽃비를 함께 맞던 동무도 진학하지 못했다. 그네들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하나 둘 부산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로 떠났다. 봉제공장이나 섬유공장 혹은 전자부품 공장에 취직이 되어 갔다는 후문이었다.
그네들은 대개가 말없이 쫓겨나듯 떠났다. 꽃비를 함께 맞던 그 동무도 그네들처럼 떠났다. 전별식도 없이.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나 우리네 고향이, 우리네 농촌들이 비어 갔을 것이다. 성년기에 접어들 무렵 나도 고향을 떠났다. 이제 고향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거진 남아 있지 않다. 풍경도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 많던 살구나무들도 이제 농촌에 드물게 보인다. 아마, 경제성 때문에 대체 작목을 한 탓이리라. 하지만, 해마다 유월이면, 문득 살구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가능하면, 농촌으로 돌아가 한 그루 살구나무처럼 늙어가고 싶기도 하다. (시인)
하지만 그윽하게 등황색으로 익은 살구를 앞에 놓고 보니, 그런 염치(廉恥)는 그새 어디로 달아났는지 입안에 신 침이 괴었다. 살구를 물에 깨끗하게 씻어 입에 한 개 넣고 깨물었다. 순간, 과육의 달콤한 감미와 동시에, 그에 못지않게 이어지는 신맛! 나도 모르게 상이 찡그려졌지만 씨는 뱉어내고, 다시 한 개 더 입에 넣었다. 몇 년 만에 맛보는 살구의 신맛이었다. 살구를 좋아하지만, 초여름에 잠시 나는 과일인지라, 마트에 갈 때 유념하지 않아 못 보고 지나가는 해가 많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살구 맛은 내 고향, 내 성장기의 맛 그대로였다.
나는 살구를 좋아한다. 어쩌면, 성장기를 보낸 농촌마을에 살구나무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고향뿐만 아니라 70년대, 아니 8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농촌에는 살구나무가 흔했던 것 같다. 고향마을도 그랬다. 집집마다 살구나무 한 그루쯤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살구나무 외에도 앵두나무, 배나무, 감나무 같은 과수도 있었지만 단연 사랑을 받는 과수는 살구나무였다. 꽃 때문이었다. 살구나무는 다른 과수보다 꽃이 일찍 핀다. 게다가 화사하기 짝이 없다. 꽃이 만개했을 때 멀리서 보면, 초가집이 옹기종기한 마을이 마치 꽃 대궐 같았다.
그러나 모든 절정이 그렇듯이, 살구꽃의 절정 또한 짧기 그지없다. 꽃이 필 때가 있으면 질 때가 있는 법. 살구꽃은 사월 중순쯤이면 벌써 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꽃구경은 가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꽃 질 때는 눈을 돌린다. 안쓰러워서 일터이다. 그러나 살구꽃은 만개할 때 못지않게 꽃 질 때 또한 장관이다. 특히, 보슬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이 여위어 가는 저녁 무렵에 지는 살구꽃은 말 그대로 꽃비에 다름 아니었다. 성장기, 어느 봄에 우산도 쓰지 않고 동무와 함께 꽃비를 그대로 맞으며 살구나무 밑에 하염없이 서 있던 기억이 불현듯 새록하다.
꽃이 지고 나면 아기 손톱만 하던 푸른 열매들이 깊어가는 봄날과 함께 눈에 띄게 짙어지고 굵어지기 시작한다. 우리들은 살구나무 아래를 지날 때면, 습관처럼 아직 익지도 않은 푸른 살구 알을 따서 입에 넣고 깨물다가는, 살구의 독특한 신맛 때문에 오만상을 찡그리며 퉤, 하고 뱉어버리고는 했다. 저놈의 살구는 언제쯤 익나 하는 눈길로 살구나무를 올려다보며 날을 헤는 아이도 있었다. 춘궁기가 아직 남아있었고 군것질 거리가 귀하던 당시에는 봄철 과수에서 열리는 살구나 앵두 같은 철 이른 과일이 우리들에게는 가장 만만한 주전부리였던 것이다.
유월이 짙어갈 무렵이면, 우리는 주머니에 가득 살구를 넣어 다녔다. 그러나 여자 아이들은 중학생쯤 되면,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내 동무 몇 몇은 여중을 졸업할 때까지, 유월에는 살구를 치마주머니나 가방에 넣어 다녔다. 당시 농민들 살림살이가 일반적으로 어려웠지만,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가정의 동무들이 그랬던 것 같다. 살구나무 아래서 꽃비를 함께 맞던 동무도 그 중 하나다. 유월에는 그 동무들에게서 살구냄새가 났다. 아마, 내게도 살구냄새가 났을 것이다. 경우는 다르지만, 나도 주머니에 살구 몇 개는 넣어 다녔던 것이다.
살구냄새. 나는 살구냄새가 좋았다. 특히 살구의 신맛이 좋았다. 그 이유는 나도 잘 모른다. 어쩌면 우리가 상식(常食)하는 과일 대부분이 오미(五味) 가운데 단맛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반해, 살구는 드물게 강한 신맛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살구냄새가 나던 동무들은 대개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더 진학하지 못했다. 꽃비를 함께 맞던 동무도 진학하지 못했다. 그네들은 일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하나 둘 부산이나 서울 같은 대도시로 떠났다. 봉제공장이나 섬유공장 혹은 전자부품 공장에 취직이 되어 갔다는 후문이었다.
그네들은 대개가 말없이 쫓겨나듯 떠났다. 꽃비를 함께 맞던 그 동무도 그네들처럼 떠났다. 전별식도 없이.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나 우리네 고향이, 우리네 농촌들이 비어 갔을 것이다. 성년기에 접어들 무렵 나도 고향을 떠났다. 이제 고향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거진 남아 있지 않다. 풍경도 완전히 변해버렸다. 그 많던 살구나무들도 이제 농촌에 드물게 보인다. 아마, 경제성 때문에 대체 작목을 한 탓이리라. 하지만, 해마다 유월이면, 문득 살구냄새가 그리울 때가 있다. 가능하면, 농촌으로 돌아가 한 그루 살구나무처럼 늙어가고 싶기도 하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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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재요일이 필자와 신문사 사정에 따라 수요일(인터넷 게재는 화요일 밤)으로 변경됨을 알려드리는 것은 필자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변경 이후로도 많은 관심과 사랑과 질정을 바랍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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