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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요? 한 만큼 반드시 대가 따르죠”
“세일즈요? 한 만큼 반드시 대가 따르죠”
  • 박세진 기자
  • 승인 2013.06.10 23: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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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을 소개합니다 A+에셋 진주지점 이찬주 부지점장
▲ “보험 세일즈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다”는 이찬주 A+에셋 진주 부지점장.
생명보험 세일즈 시작 2년만에 억대 연봉 올라
명예의 전당격인 ‘MDRT’ 등에 최연소 선정
제대로 된 ‘설계’로 보험 인식 전환해 나가야

 세일즈 업계는 자동차, 제약, 보험을 세일즈의 3대 꽃이라고 부른다. 이찬주(35) A+에셋 진주 부지점장은 3대 세일즈 중 하나인 보험업계에서 최연소 타이틀을 몇 개나 거머쥔 소위 잘나가는 세일즈맨 출신이다. 28세 때인 2006년 보험 세일즈를 시작한 이 부지점장은 2008년 나이 서른에 전 세계 생명보험협회 명예의 전당이랄 수 있는 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에 이름을 올렸다. 업계 1%라고도 하는 MDRT는 계약 이후 하자(클레임)가 없는 연봉 7천800만 원 이상인 보험 설계사에게 부여되는 인증 같은 것인데 일반적으로 억대 연봉 세일즈맨에게 주어지는 것이라 보면 된다. 그는 관리자 반열에 오르기 전인 2010년까지 3년 연속으로 MDRT에 선정됐고 MDRT 인증은 지금도 뺏지 형태로 그의 가슴에서 자랑스럽게 빛나고 있다. 또 일주일에 3건 이상의 계약을 한 주도 쉬지 않고 연속적으로 체결했을 때 주어지는 ‘3W(Week)’도 2008~2009년 2년간 한 주도 빠짐이 없는 100주를 달성했다. 이 모든 것은 당시 그가 몸 담았던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내 최연소자 획득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택시보다 더 차량 운행거리가 많을 정도로 그는 열심히, 열성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아직 30대에 불과한 나이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열정과 목표의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의 인생 이야기를 들어보자. 편집자주

 -어떻게 보험 세일즈를 시작했나.

 “대학 졸업 이후 첫 직장이 새마을금고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이후 어머니와 사정상 친 형의 조카랑 살았다. 그러나 당시 월급으로 가족을 부양하기가 너무 빠듯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들 중 가장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길이 세일즈란 판단이 섰고 알아보니 자동차, 제약, 보험을 3대 세일즈라고 했다. 그 중에서 가장 힘든 만큼 보상이 큰 것이 보험이라고 해서 한달 동안 생보, 손보 설계사와 변액보험 자격증을 딴 뒤 옛 대한생명(KLD)에 지원했다.

 당시 집은 진주였고 회사는 창원에 있었다. 지점장 면접을 통과한 뒤 부산 본부장으로부터 최종 면접을 보는데 나이가 어리고 아직 미혼이라 입사시킬 수 없다는 얘기가 돌아왔다.

 절박했던 만큼 매달렸다. ‘원망하지 않을테니 시켜보라. 시켜보지도 않고 왜 떨어트리느냐. 한 사람의 인생이 걸린 문제인데 나중에 두고 두고 원망하겠다’며 사정반 협박반으로 나갔다. 그랬더니 본부장님이 ‘당돌하다.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라’며 입사를 결정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머니가 몸져 누우셨다. 새마을금고를 그만두고 보험 세일즈를 시작한다고 했더니 모자 인연을 끊자고 했다.

 할 수 없이 회사에 한달만 입사를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 뒤 어머니를 설득하고 또 설득했다. 그래서 입사 결정나고 한달 뒤인 2006년 6월부터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일즈맨 체질이 따로 있나.

 “새마을금고서 비슷한 상품을 다뤄본 경험이 있어서 감각은 있는 편이었다. 입사 이후 한달 교육기간 동안 옛 마산 시외버스터미널 옆 찜질방에서 생활했다. 찜질방 주인의 눈치를 봐가며 사물함에 옷가지를 넣어두고 그렇게 한달 교육 후 일을 시작했다.

 진주에서 초ㆍ중ㆍ고ㆍ대학까지 마쳤지만 나이가 어려 기반을 잡은 친구도 없었다. 또 가족 중에도 보험 사원이 있어 다른 지역의 전혀 모르는 사람 위주로 세일즈했다.

 창원 상남동 회사에 오전 8시 출근하기 위해서는 진주 집에서 오전 6시에 일어나야 했다. 출근 이후 거창, 함양, 산청, 거제, 통영, 하동, 남해 등 대도시보다 소도시 위주로 다녔다. 아무래도 소도시는 시골 인심이 남아 있어서 문전박대가 덜했다.

 한 사람을 만나면 배운대로 설명하고 만족하는 고객과 계약이 이뤄지면 또 다른 분 소개를 부탁하는 식으로 뛰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2시쯤 잠자리에 들고 그러기를 3년 정도 계속했던 것 같다. 일반 차량은 1년에 2만km 정도 운행하는데 하루에 도내 6~7군데를 다닌 내 차 한달 운행거리는 1만 1천~1만 2천km였다. 택시도 한달에 8천km 정도 운행한다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무식하게 열심히 다닌 셈이다.

 그 덕에 당시 회사 최연소 타이틀을 갈아치울 수 있었다. 전 세계 생명보험 세일즈맨 억대 연봉자 인증인 MDRT에 서른살인 2008년부터 시작해 2010년까지 3년간 선정됐다.

 또 업계가 인정하는 ‘3W’를 2008~2009년 2년간 달성했다. 이는 100주간 한 주에 3건 이상의 계약을 한 셈인데 100주에 3건만 잡아도 300건이다. 고객을 만난다고 해서 다 계약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니 적어도 수천명은 만난 것 같다.

 보험 세일즈맨으로서 정점도 이 시기였는데 2억 원 정도의 연봉을 받았다. 한달로 치면 1천500에서 1천600만 원 정도됐다.”

 -세일즈를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자기가 한 만큼 반드시 대가가 따르는 업이어서 누구에게나 기회는 있으나 누구나 성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당시 나는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절실했지만 지금은 실적 갖고 닥달하는 상사가 없다.

 이 때문에 오히려 나태해지기 쉬워 실패할 가능성이 더 높다. 보통 10명이 입사해 1년이 지나면 2명이 남는 정도의 확률이다. 그래서 ‘살아 남아 있으면 성공한다’고도 한다.”

 -6월로 업계에 몸담은지 7년째다. 세일즈를 정의한다면.

 “억지로 만들라면 만들 수 있겠지만 딱히 뭐라고 정의하기 정말 어려운 단어다. 내 경우만 보면 세일즈는 꿈이라고 할 수 있다. 세일즈를 하면서 많은 사람을 알게 됐고 경제적인 성공도 얻었으니 개인적으로 꿈을 이루는 수단이 된 셈이다.”

 -앞으로 목표는 무엇인가.

 “많이 바뀌었다고 해도 아직 보험 세일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다. 제대로 하는 사람이 늘면 이러한 시선도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가 ‘아빠 뭐하시니’하고 물었을 때 보험한다고 하면 ‘좋은 일 하시네’하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

 후배들 중에도 억대 연봉자가 더러 있다. 체계적인 세일즈 노하우를 전달해 인식 전환에 도움이 되고 싶다. 지금은 현장형 관리자의 길을 가고 싶다.”

 -보험의 필요성을 설명한다면.

 “아버지로 인해 필요성을 절감했다. 어릴 때는 부유하지도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내가 12살 때 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이후 6년간 병상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아무런 대비가 없었던 가정은 아버지 병 구완에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요즘 흔한 암보험이나 종신보험이 있었다면 어머니가 그렇게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보험은 금융 상품의 하나다. 정부의 국민건강보험이나 국민연금이 보장할 수 없는 사각지대를 보험이 메워준다고 보면 된다.

 통계청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 10명 중 8.5명이 사회보험에 가입돼 있지만 아직 완벽하지 않다. 이 때문에 보험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몸 담고 있는 회사는 어떤 곳인가.

 “새로운 형태의 종합 금융회사다. 보험은 물론 모기지, 부동산, 상조가 합쳐진 개념이다. 기본 바탕은 보험이므로 27개 생보ㆍ손보사와 제휴를 맺고 있고 고객의 필요와 가장 적절한 상품을 연계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러한 형태를 업계에서는 ‘GA’이라고 통칭한다. 한 회사에 국한되지 않아 고객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 무엇보다 큰 특징이다. 더불어 맞춤형 설계가 가능해 설계사 입장에서도 더 유리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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